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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만년필을 통해 본, 존재의 소중함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1 04:04 60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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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만년필을 통해 본, 존재의 소중함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이 바둑왕 이세돌 9단을 압도적으로 이기는 첨단과학기술의 시대, 불행하게도 사람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이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학대당하다 못해 죽임까지 당하는 현실은 더욱 아프다. 돌봄과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나, 그 돌봄과 보살핌을 주는 제도나 마음은 급감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가 구석으로 내몰리는 현재의 상황, 모든 존재의 생명력이 자본이나 권력 앞에 짓밟히는 현실, 과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여기서 법정 스님의 만년필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미 <무소유>라는 책에서 하신 이야기다. 어느 날 스님은 일본 동경에 유학 중인 한 스님으로부터 촉이 가는 만년필 한 자루를 선물로 받았다. 그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며 만년필과 친구가 되었고 그걸로 제법 많은 글을 썼다. 그런데 나중에 스님 자신이 프랑스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어떤 가게에서 그와 똑같은 만년필이 잔뜩 있는 걸 보고 한 자루를 더 구입했다. 스님의 만년필이 두 자루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글을 쓰긴 하지만, 예전부터 써왔던 만년필에 대한 고마움과 살뜰함이 이상하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스님은 마음속으로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스님의 해답은 간단했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산 것을 다른 스님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아,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만년필과 스님의 관계도 처음처럼 좋아졌다.

스님이 이 경험 속에서 내린 결론은, 필요한 것만 갖고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 ‘무소유’의 삶이란 것이다. “하나가 필요할 땐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는 통찰이다. 참 고귀한 지혜다.

바로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필요나 욕구를 정확히 알아차리는 것이다. 무엇이 진정 나의 만족스러운 삶에 필요한 것인가, 이것을 명확히 아는 것이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출발점이다. 

 

생각해 보면, 요즘은 모든 것이 ‘너무 많아’ 탈이다. 어린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잃어버린 연필이나 우산이 수북이 쌓인다. 산업화의 진전으로 대량생산 시스템이 발달한 결과, 모든 게 너무 흔하고 많다 보니, 작은 연필 한 자루도, 우산 하나도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없으면 새로 사면 그만’이란 생각이 지배한다. 특히, 하루가 달리 변하는 첨단 기술 세계는 이런 소중하고 살가운 관계를 구조적으로 해친다. 컴퓨터나 휴대폰이 고장 나서 고치러 가면, “수리비보다 새것 사는 게 더 싸요. 이참에 새것 하나 구입하시죠.”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첨단 기술 영역만이 아니다. 상품 세계는 끊임없이 새것을 만들어내고 광고나 유행(패션)을 통해 자꾸 새로운 소비를 촉진한다. 그래야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서글픈 사실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조차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고 살갑게 대해야 하는데, 그저 일회용품처럼 가볍게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상품 세계의 원리가 인간 세계에 스며든 결과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중한 하나의 원리를 깨닫는다. 작은 물품 하나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살가운 관계를 맺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논리’ 내지 ‘생명의 논리’임에 반해, 부단히 유행을 만들어내며 대량 소비를 촉진하는 것은 곧 ‘상품의 논리’ 내지 ‘자본의 논리’라는 점이다.


좀 불경하지만, 스님의 만년필과 스님이 느낀 만족도를 잠시 수학적으로 표현해 보자. 상품이나 자본의 논리에서는 일반적으로 ‘1 + 1 = 2’라는 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에서 느낀 만족도가 1이라면, 두 개에서 느끼는 만족도는 2가 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멋진 판촉 사원들이 이른바 ‘시너지 효과’라며 ‘1 + 1 = 2 + α (단 α>0)’가 된다고 선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나 생명의 논리에서는 그 만족도가 ‘1 + 1 = 0’으로 나타났다. 즉, 하나에서 느끼던 충분한 만족감이, 동일한 것이 두 개가 되었을 때 예상과 달리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세상 만물과 우리의 만족도를 이 공식으로 모두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부 관계나 자녀 관계 등에 이를 적용하면 정말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잘 이어나가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둘이 되거나 아내가 둘이 된다고 상상해 보라. 우스갯소리로는 ‘참 좋겠다!’고 할지 모르나, 금세 혼란과 불행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자녀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하나가 아니라 둘, 또는 셋이라도 부모에게는 이 세상에 모두 ‘둘도 없는’ 존재임이 틀림없다. 첫째는 첫째대로 고유하며, 둘째는 둘째대로 고유하다. 막내는 막내대로 고유하다. 그런데 생명공학 덕택에 ‘동일한’ 복제 아이가 하나씩 더 생긴다면 과연 맨 처음의 고유함과 소중함이 유지될 것인가? 세월호 참사에 아이 하나를 잃은 부모의 경우, 설사 남은 자녀가 여러 명 있다 하더라도 그 부모의 마음은 마치 온 세상을 다 잃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설사 누군가 생명공학으로 똑같은 아이를 만들어준다고 한들, 과연 그 잃어버린 아이를 대체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모든 소중한 존재들과 온 마음을 다해 살가운 관계를 맺고 잘 이어나간다면, 그에서 오는 만족도는 (내 필요와 욕구를 충족할 만큼) ‘충분히’ 클 것이다. 물론, 여기서 타 존재와 살가운 관계, ‘하나 됨’의 관계를 맺는다 할 때, 그 관계의 목적 내지 지향이 정치권력이나 물질적 이득과 같은 자본의 논리 속으로 재포섭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런데 우리가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 관계나 선임-후임 관계, 학교에서 맺는 스승-제자 관계 등도, 겉보기엔 동시에 다수가 관계하니까 한 자루의 만년필과 같은 소중하고 살가운 관계를 맺기 어려울 듯하지만, 실은 모든 존재가 다 고유하다. 자본의 논리 안에서는 ‘그놈이 그놈’일지 모르나, 생명의 논리 안에서는 ‘모두’ 소중한 존재다.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려면 결국, 자본의 논리를 넘어 생명사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라며 부모가 못다 이룬 한을 풀기 위해 아이들을 어릴 적부터 닦달한다. ‘일등’을 하고 ‘100점’을 맞아야 하며, ‘일류대’를 가야 성공할 것 같다는 착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부모는 부모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아이는 아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부모가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면서도 아이가 아이 자신의 꿈을 꿀 수 있게 최대한 지지한다면, 부모나 자식 ‘둘’ 다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 이 세상 만물과 나와의 바람직한 관계는 요컨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여기서 ‘둘’이라는 것은 각자 고유한 존재를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며, ‘하나’라는 것은 더불어 하나의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만든다는 뜻에서 그러하다. ‘무소유’를 실천하신 법정 스님이 다른 스님(들)과 맺은 관계나 또 두 분의 스님과 만년필 한 자루와의 관계도 결국 ‘따로 또 같이’ 그리고 ‘같이 또 따로’가 아니던가? 이렇게 ‘따로 또 같이, 같이 또 따로’의 원리를 일상 속에서 실천하며 세상과 멋진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세상과 나는, ‘둘’이면서도 ‘하나’인(而二不二) 것을!

 

 

강수돌_인드라망전문위원

마을 이장을 맡아 함께 사는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조치원골짜기에서 사람농사, 먹거리농사를 지으며 사는 농부이자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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