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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백남기입니다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1 04:09 70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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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백남기입니다 



우리는 백남기입니다. 


작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던 백남기 어르신은 경찰의 불법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당시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었던 하승수 님의 전화를 받고 알았습니다. 늦은 가을걷이로 서울에 올라가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달래며 집회 생중계를 보다가, 피곤했던지 잠시 잠들었는데 전화를 받고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제 마음은 빚진 자의 심정에 사로잡혔습니다. 백남기 어르신과 같은 지역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보니 더욱 나 자신의 일로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할 수 있는 대로 ‘백남기 살리기’ 농산물을 팔아서 적립금을 백남기 대책위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백남기 어르신과 가깝게 지낸 농부들과 함께 보성 인근의 장터를 돌아다녔습니다. 국가폭력이 사람을 죽을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음을 열심히 알렸습니다. 백남기 농부와 동고동락하신 분들이라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절절한 심정을 전했습니다. 함께 한 분들과 장터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스팔트 농사지으러 서울에 올라가자고 전날 밤에 전화했다는 농부는 “내가 그날 전화만 안 했더라도...”라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 흘리기도 하셨고, 평생 친구로서 살아오신 삶을 담담히 전해주기도 하셨습니다. 이분들과 함께 하면서 백남기 농부님이 살아오신 삶과 성품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백남기 어르신의 평생 화두는 ‘민주화’와 ‘농업’이었습니다. 그는 1968년 중앙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박정희 유신 독재 체제에 저항하다가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 때 1차 제적이 됩니다. 1973년 10월에는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가 수배되어 명동성당에 피신했습니다. 1975년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5년간 수녀원의 잡부, 포도원의 잡부, 수도사 생활을 하게 됩니다. 1980년 복학해 어용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5일 중앙대 학생 4천여 명이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역까지 행진할 때 이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5월 17일 전두환 군부의 계엄 확대 조치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되었습니다. 이때 3차 제적 및 퇴학 처분을 받게 됩니다. 1980년 8월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1981년 3.1절 특사로 가석방됩니다. 그리고 백남기 농부는 가족이 9대째 살아온 전라남도 보성 웅치면으로 귀향합니다. 귀향해서는 가톨릭농민회와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했습니다. 1986년 가톨릭농민회 가입, 1989년-1991년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 1992년-1993년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 1992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준) 주도, 1994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 2014년 가톨릭농민회 전남 동지회 회장, 2015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처럼 백남기 어르신의 삶은 ‘민주화’와 ‘농업’을 향한 헌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의 아름다운 추모 속에서 환송을 받으며 장례를 치러야 마땅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백남기 어르신은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의식을 잃은 채 317일을 버텨야 했고, 죽어서까지도 권력의 검은 그림자에 둘러싸여 강제부검 논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생명을 다하고서도 우리가 얼마나 비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계십니다. 우리 사회가 밥을 생산하는 농부를 얼마나 천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역설적이지만 ‘민주화’와 ‘농업’이 중시되는 자유와 평화의 세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저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새겨지는 사실은 “나는 백남기다”라는 것입니다. 백남기 어르신의 죽음을 추모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우리는 백남기다”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냉정하게 인식하고 세상의 변화는 나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바랍니다.


백남기 어르신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신 작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집회는 위기에 몰린 농민, 노동자, 서민의 생존권 투쟁이었습니다. 시민의 당연한 권리인 집회시위의 자유를 행사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갑호비상령’을 발동하고 시위하는 시민을 ‘폭도’로 간주했습니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진압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는 정부 스스로 독재 정권임을 자인한 것입니다. 당시 집회에 참여했던 분들은 “오늘 누구든 한 명은 죽을 것 같다”는 살기를 강하게 느꼈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일 선봉대에서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에 맞섰던 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백남기 어르신의 죽음은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상황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민의 표현 자유와 집회시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것은 독재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백남기 어르신이 아니었더라도 선량한 시민 누군가는 물대포에 맞아 죽음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누군가는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백남기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크게 외쳐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이 외침에 도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백남기입니다!


백남기 농부는 선량한 시민들과 함께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업, 농민의 현실이 낭떠러지 벼랑 끝에 몰려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이후 농업은 산업화 과정에서 내부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농촌에 살던 농민들은 대대로 농사짓던 땅에서 쫓겨나 도시빈민노동자로 전락했습니다. 농촌을 지킨 소수의 농민은 도시노동자들의 낮은 임금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현재의 쌀값은 20년 전 가격에 머물러 있습니다. 농가당 연평균 농업소득은 1,000만 원이 못됩니다. 농가당 빚은 3,000만 원에 이릅니다. 농사지어서 빚 갚는데 다 들어가고 있습니다. 농업은 금융의 노예로 추락했고, 농민들은 막노동이나 식당에서 부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농민들이 더 이상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에 가까울 정도로 농업의 현실은 벼랑 끝에 몰려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편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졌습니다. 백남기 농부의 죽음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추구해온 산업화, 도시화의 시스템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백남기 농부로 상징되는 농업, 농민을 죽인 것은 우리 모두입니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결국, 농촌의 문제는 도시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도시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농촌의 삶이 조금 더 나아져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제 농업, 농민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농촌을 잃어버린 도시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1월 12일은 백남기 어르신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신 지 1주년이 되는 민중총궐기입니다. “우리는 백남기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시민의 거대한 물결을 거리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016년 10월 19일 늦은 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최혁봉_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12년 전 귀농해 전남 보성 벌교에서 농사짓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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