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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길을 걸으며 들여다본 평화의 속살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1 04:27 64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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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길을 걸으며 들여다본 평화의 속살



저는 지금 인천 연안부두에서 팽목항까지 세월호가 갔던 뱃길을 따라 54일간 8백여km를 걷는 순례길 위에 서 있습니다. 지난해 세월호를 교훈 삼아 사회적 성찰과 전환의 순례길을 만들자고 마음 모은 후 진행되는 세 번째 여정입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청년들이 나서 한반도에 높아진 전쟁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평화의 씨앗을 뿌려보자고 나선 길이기도 합니다.


4·16순례길은 특별히 마을과 마을을 이어 조성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쌩쌩 달릴 일직선 도로가 필요하지 굽이진 옛 마을길이 무슨 소용이냐고 타박할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거의 걷지 않고 차로만 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길이 단순히 이동시간을 버리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질 테니까요.


하지만 길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길 위에는 사람이 있고, 자연이 있고, 사회가 있으며, 오랜 세월 그것들이 빚어온 사회적 생명체인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이 길과 집, 농사와 자연, 사람과 동식물, 사회활동이 집약된 하나의 생명체라면, 마을길은 마을이라는 생명체를 유지해 주는 혈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을길은 자연지형을 따라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사람이 다니고 다녀서 굽이굽이 형성되었습니다. 마을길은 마을 안 집집을 이어주고, 작은 시내나 야트막한 야산을 끼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 줍니다.


순례를 통해 만난 마을길은 주변 풍광과 잘 어울리는 은근하고 멋스러운 길이었습니다. 마을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서면 수백 년 자리를 지킨 큰 나무들이 먼저 순례자를 반깁니다. 그 밑에 소박한 정자라도 한 칸 있으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런 마을은 왠지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길을 따라 마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논과 밭, 집들이 각양각색으로 서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땀방울과 시간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한국의 마을은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거칠고 빠른 변화의 격랑에 빠른 속도로 변화하였습니다. 마을길도 같은 운명을 겪은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큰 포장도로에 밀려 잡풀이 무성하거나, 큰 농장이나 공장으로 난 길의 위세에 눌려 사람의 흔적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거친 변화 속에서도 대부분의 마을길들은 아직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잠깐 걸으며 마을 속을 넘나드는 것만으로도 묘한 설렘과 향수를 주었습니다. TV나 매체로 보거나, 차를 타고 스치듯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마을길을 걸으며 거쳐 간 한 마을이 1백여 개는 넘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화성, 평택, 아산, 당진, 서산 등 수도권과 가까운 지역의 마을 상당수는 이미 난개발이 임계치를 넘어선 듯했습니다. 축사와 공장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고, 어떤 곳은 심한 악취가 풍겼습니다. 사람이 오히려 공장과 축사의 틈바구니에 끼어 사는 듯한 마을도 있었습니다. 누구든 그런 마을로 이주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니 방치한다면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마을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한국사회가 유럽과 같이 지역과 마을이 살아있는 공동체적이고 분산된 사회로 변화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업화와 근대화를 넘어설 전환의 근거지를 잃고 마는 것이지요.


주민 대부분이 노령화되어 있고, 황폐해진 마을에서도 사람들의 인심은 살아 있었습니다. 사찰 교회 등 종교 시설도 그렇지만, 마을 주민들은 청년순례단을 기꺼이 환대하고, 재워주고, 먹을거리를 나눠주었습니다. 경계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분도 간혹 있었지만, 우리가 만난 시골 어르신들 대부분은 순례단을 보고 누구냐고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관심을 보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음료수를 건네고, 커피를 타주고, 밑반찬을 건네주었습니다. 낯선 젊은이들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 한마디만 건넬 줄 안다면 따뜻하게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만든 길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개는 좋은 자연경관 중심으로 만들어졌을 뿐, 그 길 위에서는 사람도 마을도 찾기 힘듭니다. 숙박, 놀이시설들만 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길에서 생명력이 생기기는 어렵습니다.


마을은 여전히 파괴되고 있었습니다만,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을이 갖는 가치를 인식하여 마을생태계 훼손을 최소화하도록 사회적 원칙과 기준을 정립하는 일이 시급해 보였습니다. 순례길이 마을과 마을을 이어 잘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길을 보는 우리 사회의 말초적인 시각을 바꾸는 것일 뿐만 아니라, 쇠락해가는 마을을 살리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순례 기간 만난 우리 산하 대지는 정말 눈부셨습니다. 군데군데 길이 끊기고, 난개발로 파헤쳐진 상처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지만, 그 상처들로도 다 가릴 수 없을 만큼 국토는 아름다웠습니다. 한편으로는 길 위에 서니 생명의 위기가 또렷이 보였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국토인데도 우리는 국토와 그 안에 깃든 생명을 너무 함부로 다뤄왔습니다. 사람도, 철창 안에 갇힌 개들도 개발에 밀려 모두 외딴섬처럼 고립되어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을이 처한 위기를 내 집 울타리를 높이는 방식으로 대처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을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면 그 마을 사람들의 삶이 평화롭고 정돈되기 어렵습니다. 삶의 터전 전체가 오염되고 파괴되어 가는데 그것을 함께 회복하기보다 자신만의 성을 쌓아 그 속에서 안전하기를 바랍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자기만의 공간으로 숨는다 해서 정말 나 혼자 안전할 수 있을까요?


길을 걷게 되면 필연적으로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깊어집니다. 순례단은 이번에 평화를 가슴에 품고 걸었습니다. 과연 평화란 무엇인가요? 저는 이번 순례를 통해 평화란 아름다운 산하 대지와 그 안에 깃든 만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일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삶의 터전을 지키고, 저마다의 소중한 일상을 보호하는 일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평화가 제 삶 안으로 조금씩 들어올수록, 사람들이 생명과 생명의 터전인 자연을 이토록 함부로 대하는 한 평화를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가 생명의 가치를 외면한 우리 모두에게 보낸 경고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경고를 아직 중대한 나의 문제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위기에 대한 무감각, 생명의 터전인 마을의 방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한반도가 직면한 평화 위기의 본질이자 장애물이 아닌가 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반도 전쟁 위기 앞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힘을 키워서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인류사에서 무기로 평화를 얻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단순한 교훈을 잊어먹는 이유는 이 평범한 진실을 자기화할 만큼 일상이 평화롭지 못하고 여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조직도 대부분 단기 이익에 매몰되어 일상을 희생시키는 삶을 삽니다. 그렇게 희생시킨 일상의 평화가 폭력과 전쟁에 대한 무감각, 혹은 외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물론 한반도 평화가 생명의 위기를 직시하는 것만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4대 강국에 둘러싸인 한반도 주변 정세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매우 지혜로운 외교적· 정치적 해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하지만 외교적·정치적 해법이 제대로 발휘되려면 생명의 위기, 평화의 위기에 대한 시민적 각성이 필요합니다. 시민적 각성은 밖을 향하기 전에 우리 각자의 삶에서 반생명적인 요소를 걷어내고, 제 삶의 평화를 일궈내는 우리 각자의 노력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나로부터 생명 위기를 직시하고, 직장으로, 가족으로, 공동체로 확산하여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임한다면 평화의 씨앗은 마을에 뿌리를 내리는 데로 저절로 진전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마을과 마을길을 잇는 것과 같은 노력이 함께 시도된다면 평화는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반석 위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다소 주관적인 느낌이겠지만, 마을길을 걸으며 평화의 속살을 들여다본 것 같고, 그 속살을 이제 함께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정웅기_생명평화대학 운영위원장

지리산 실상사 생명평화대학에서 청년들과 공부하며 새로운 사회, 길에 대한 모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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