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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여기 함께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1 04:28 63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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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여기 함께



2016년 5월 강남역 사건(노래방 화장실에 숨어 기다렸다가 여자가 들어왔을 때 살해한 사건) 이후, 슬픔과 연대의 물결이 강남역을 뒤덮었다고 들었다. 처음 이 사건을 들었을 때, ‘여자라서 당했다’라고 데자뷰되는 소름 끼치는 두려운 기억들이 각자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각자의 일상과 연결된 그 기억과 연결해서 추모와 연대의 마음이 거대한 공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조금 의외이기도 하다. 왜냐면 이전에도 약자에 대한 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은 늘 있었지만, 이런 규모의 반응을 받았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시대의 에너지는 무엇일까? 지진파처럼, 응축돼 있던 것이 터져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에너지는 차곡차곡 쌓여 왔을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여성이 투표권을 가진 지도 100년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지금도 중동의 몇몇 나라는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미소지니(mysogyny, 여성 혐오) 문화라고 하는 젠더 불평등에 기인한 여성 혐오의 역사는 인류 역사 이래 수 천 년이라 하고, 그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석상들처럼 우리 문화 안에 각인되어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경험하는 미소지니의 한 모습으로는 명절 풍경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부계혈통 중심의 조상을 기리는 제사상을 차리는 이는 다른 성을 가진 며느리들이다. 여성들의 사회활동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여성은 가정에서 살림과 육아까지 제대로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다.


일상적인 성폭력(성추행, 성희롱, 성폭행), 야동-리벤지포르노(헤어진 전 여자 친구와의 섹스 동영상을 인터넷상에 공유)의 유통, 소라넷 사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살인(강남역 사건, 제주도 올레길 사건, 최근 제주 게스트하우스 살인 사건, 오래전 화성 연쇄살인 등). 이런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여성들에게는 일상이다.


이뿐 아니라, 여성들은 공적 활동 체계 안에서 남성들의 보조자로 역할을 하고 있다. 주요 방송사의 메인 앵커는 경력 있는 남자이고, 여성 앵커는 젊고 예쁜 사람이다. 전체 여성의 46.4%가 경력 단절을 경험하고, 남녀 간 임금격차는 여성이 남성보다 37.2%가 낮다. 사회적으로 젠더에 따른 위계가 있다는 것, 내가 그것을 알건 모르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 문화계 미투(me too), 위드유(with you) 운동을 보면서 많은 감정이 일어난다. 쌓이고 쌓인 것들이 터져 나오는 역동, 혁명적 상황에 고무되기도 하고, 그 고통이 느껴져 마음이 쓰리기도 하다.


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나도 자라면서 친족 내에서, 학창시절 술자리에서, 대중교통 안에서 크고 작은 경험을 하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없던 일로 지우면서 평생 나 혼자 가져가야 하는 일로 묻어놓고 살고 있다. 직장 내 성폭력으로 힘들어하는 친구가 경찰서를 오가며 고군분투할 때, 그 친구에게 어떻게 힘을 주어야 하는지도 전혀 몰랐다. 업계에서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하는데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 친구를 더 힘들게 하지는 않을지, 이렇게 몸과 마음이 아픈데 빨리 잊고 전환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이 사건들을 접하면서 쓰린 마음 중 하나는 성폭력을 허용하고, 방관하고, 외면하는 태도로 살아온 내가 이 강간문화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 문제를 잘 다루어 온 경험이 없다. 그런 경험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른다.


피해자는 말하는 것부터가 고통이기 때문에 그냥 혼자 묻고 가기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건,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서지현 검사 글에서 재인용)’이기 때문이다. 많은 고발자가 강조하는 점은 ‘이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건의 피해자로만이 아니라, 이 은폐와 묵인을 끝내는 운동의 ‘주체’로 가해자와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고통을 직시하는 용기이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이다. 그분들의 용기에 힘입어, 우리는 문제를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던져진 질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사성제-고집멸도에서 고성제를 말씀하셨다. 고통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하나이다. 고성제는 도를 얻기 위해서 고통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고통이 있을 때 그것을 직면하고, 깊이 들여다보아야 도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라 해석한다. ‘있는 그대로’ 그 고통을 보아야 한다.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 앞서 말한 미소지니 문화와 권력의 문제, 그리고 혐오문화가 아닐까 싶다.


명백한 폭력인 성폭력은 어떻게 자행되고 은폐될까? 묵인과 방조, 우유부단과 무기력 속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폭력이다. 연희단거리패 사람들이 수십 년간 그 안에서 살아왔듯이, 우리는 수 천 년 동안 이 안에서 살아왔다. 지워버리고, 묻어버리고, 무뎌지고 무너지면서.


돼지 발정제 강간 모의를 한 사람이 그 이야기를 책에 쓰고도 버젓이 제1야당의 당대표를 하고 있다. 골프장 캐디, 기자를 성추행한 사람들도 버젓이 국회의원으로 산다. 성폭력 의혹을 받는 남자 배우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적당한 배역을 맡아 연기로 보답하겠다며 이미지를 세탁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점차 혼미해졌다.


이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바름을 세워야 한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것이라거나, 피해자의 인격이 이상하다는 말은 문제가 가리키는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고, 그것이 의도적이든 무지에 의한 것이든 바르지 못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수많은 용기 곁에서 ‘나도’, ‘함께’하겠다는 연대이며 자기 성찰이 아닐까? 침묵과 방관을 넘어 드러내고 토론하고 대화하여 바름을 세우고, 우정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이제까지 남성의 언어로 쓰인 익숙한 세계에 다른 언어로 쓰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지금까지의 낡은 익숙함을 버리고 낯선 시선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 이것이 숙처방교생(熟處放敎生) 생처방교숙(生處放敎熟)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한다)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보는 수행이 아닐까 한다.


고통을 똑바로 보고, 해결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다.


 

최수옥_작은학교 교사

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북덕북덕이며 즐겁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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