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수행이 하나되는 삶을 위하여 - 존재의 실상, 본래부처 > 도법스님

본문 바로가기

인드라망 아카이브

일과 수행이 하나되는 삶을 위하여 - 존재의 실상, 본래부처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22:35 673 0

본문

* 이 글은 인드라망활동가 뿌리교육 자료에서 발췌, 요약한 것으로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예전에 한달에 한번씩 불광사에서 법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불광사를 창건하신 광덕스님은 ‘구원성불론(久遠成佛論)’ 즉, 본래부처를 가르치셨습니다. ‘본래 성불했다. 지금 여기에서 본래부처의 광명이 빛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본래부처로 살아라. 본래부처의 삶이 어떤 것인가. 바로 보현행원의 삶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부처의 실상을 모르고 실상과는 관계없이 전도몽상 즉, 자기가 갖고 있는 선입견 또는 관념대로 생각합니다. ‘업장덩어리인 내가 감히 부처라니, 말도 안돼!’ 하고 스스로를 비하합니다. ‘맨날 미워하고 욕심부리는 하찮은 존재인 내가 어떻게 부처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부처는 아주 특별한 존재, 거룩한 존재라는 추상적이고 관념화된 언어에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태도가 자신이 본래부처임을 사실대로 받아들이는 데 아주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불교는 수행해서 부처되는 가르침이라고 설명하고, 우리들도 너나없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열심히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해서 부처된 다음, 부처로 살려고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불교수행에 대한 사고와 신념을 정밀하게 따져보면, 불교를 공부한 다음 수행을 하고 수행한 다음 깨닫고 그 다음에 부처로 살아가는 네 단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불교수행의 실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스스로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과 수행이 따로따로가 됩니다. 분리시켜 생각하는 한, 늘 원인과 결과 ․ 과정과 목적이 항상 두 개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개로 나누는 관념적 지식과 믿음 때문에 일과 수행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행과 일 또는 삶이 이원화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본래부처론으로 보면, 수행해서 새로 부처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부처인데 무슨 수행이 따로 필요하며 다시 부처되려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직면한 존재의 실상이 본래부처이므로 그 밖에 달리 더 추구하고 더 얻고 더 깨닫고 더 소유할 것이 애초부터 있지 않습니다. 수행해서 깨닫겠다고 하는 분리된 사고를 할 것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그대로 본래부처의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본래부처’인데 새삼스럽게 수행을 해서 다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소를 타고 있는데 다시 소를 찾으라고 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잘 알다시피 대승불교는 ‘본래부처론’을 주장합니다.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당장 부처로 살자는 논리이지요.

아무리 따져 보아도 일과 수행, 삶과 수행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분리되면 이미 불교가 아니며, 불교를 잘못하는 것이지요. 분리되면 온전한 삶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수행한 만큼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지요. 나날이 확신이 깊어지고, 흔들림이 없고, 삶이 더 단순소박해질 수가 없지요.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교와 수행, 수행과 일, 수행과 삶이 하나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나되지 않고 분리되는 한, 아무리 불교공부와 수행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또 다른 전도몽상에 불과함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다음은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을 바른 견해와 연결시켜서 이야기해 보지요.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의 세계관과 가치의식과 그리고 현재의 상태를 제대로 보고 이해하지 않고도 인드라망 운동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하지요.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의 내용에 대한 내 이해와 인식과 신념이 흔들려버리면, 어떻게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의 실상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념이 흔들림없이 늘 견지되고 유지되는 것, 이것이 ‘정견(正見)’이고 ‘정정(正定)’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비심이 흔들리지 않는 것, 서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 것, 너와 나는 한 몸 ․ 한생명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흔들림 없는 것, 이것이 정정입니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볼 때, 생활과 불교수행 ․ 일과 불교수행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도 모르고 불교도 모르는 것이며, 일도 제대로 못하고 불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됩니다.

불교수행은 항상 직면한 현재의 삶을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이와 같은 정신을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직면한 중생고를 싫어하거나 회피하지 않아야 보살행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장좌불와를 하고 십년면벽을 한다고 하더라도 직면한 현재의 삶을 떠나서 정견과 정정의 삶이 가능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자신의 실상 또는 현재의 삶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는 것, 여실하게 사유하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한 다음 수행을 하고, 수행한 다음 깨닫고, 깨달음을 얻은 다음 부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처니까 지금 당장 부처로 사는 삶이 팔정도의 삶인 것이지요. 현재의 실상을 제대로 보고 사유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고 노력하고 깨어있고 흔들림없으면, 그것이 부처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불교는 부처되는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본래부처이므로 지금 당장 본래부처로 살자는 가르침입니다.

임재선사는 언제 어디에서나 주체적으로 진리를 선택하고 실천하면 언제 어디에서나 그 삶이 참되고 자유롭다(隨處作主 立處皆眞)고 했습니다. 매 상황 매 순간마다 주체적으로 진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수행이요, 중도수행이며, 올바른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수행이고, 수행이 삶이지요. 어떻게 살펴보아도 수행과 삶, 일과 수행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적용하기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