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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부처와 팔정도 - 일과 수행이 하나되는 삶을 위하여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22:38 63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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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 활동가 뿌리교육 자료

 
얼마 전에 청주순례를 했습니다. 그 때 보았는데, 청주의 간판스타가 ‘직지’더군요. 직지는 백운화상의 어록인 직지심체요절을 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되어 있습니다. 고려 때, 태고 보우스님과 백운스님이 중국에 가서 석옥 청공선사한테 법맥을 전수받아서 들어왔습니다. 태고 보우스님은 국사가 되어 당시 체제 안에서 불교를 일으킨 인물이라면, 백운스님은 고고하게 은둔수행을 통해 정법의 횃불을 피워 올리신 스님입니다. 직지심체요절에서 백운화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학불법 단자무심거(莫學佛法 但自無心去)”
‘특별하게 불법을 따로 배울 것 없다. 다만 스스로 무심하게 살아가라’ 백운스님 선사상의 핵심이 이 한마디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백운선사의 선가풍을 무심선이라고 하는데, 선불교 정신이 단순명쾌하게 잘 표현되었습니다. 불교적 삶의 전부라고 해도 괜찮고요. 그런데 우리들은 ‘무심’하면 사고가 정지된 상태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볼 때, 사고가 정지되면 그것은 목석이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요. 불교 역사 속에서 무심도인을 들어본다면, 누구누구일까요? 대표적인 인물이 부처님, 가섭, 달마, 혜능, 이런 분들을 들 수 있겠지요. 그 분들이 목석처럼 살아갔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지요. 그야말로 끊임없이 사고하고 대화하고 배우고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옛 스승들의 예로 볼 때, ‘무심’의 상태가 사고의 정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무심’을 사고의 정지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무심의 개념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고, 불교를 왜곡되게 알고 있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요? 일차적으로 언어의 속성, 한계, 문제를 잘 모르고 잘못 다루기 때문이지요. 달리 말하면, 언어를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중도 또는 실사구시적으로 다루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를 살펴봅시다. 생명평화경에 ‘하느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느님이라는 말이 나오면 기독교인들은 좋아하는데, 불교인들은 싫어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부처라는 말을 쓰나, 하느님이라는 말을 쓰나,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익숙하고 좋아하는 개념이냐 아니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말을 통해 전하려는 실제 내용과는 관계없이 본인의 선입견이나 관념에 따라 전혀 엉뚱하게 판단해 버립니다. 바로 말에 놀아나고 말에 속고 말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우리들 대부분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관념 또는 추상적으로 다루지 말고 중도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고 혼란스러운 것도 언어를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관념적, 추상적으로 다루기 때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번 ‘본래부처’라는 말을 가지고, 중도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본래부처라는 말이 갖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다루어 봅시다.
요즘 한달에 한번씩 불광사에서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불광사를 창건하신 광덕스님은 ‘구원성불론(久遠成佛論)’ 즉, 본래부처를 가르치셨습니다. ‘본래 성불했다. 지금 여기에서 본래부처의 광명이 빛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본래부처로 살아라. 본래부처의 삶이 어떤 것인가. 바로 보현행원의 삶이다’ 라고 했습니다.  법회할 때, 신도들에게 “본래부처라는 가르침을 들었는가” 하고 물어보면 다들 들어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본래부처임을 알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멀뚱하게 쳐다볼 뿐 대답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믿는데, 자기가 본래부처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부처라고 하는 것이 큰 스님 가르침의 핵심인데, “왜 안 받아들이는가” 하고 짚어보면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가르치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그 자체는 관념화됩니다. 분리되지 않았는데 분리된 것으로, 고정되지 않았는데 고정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관념화된 언어를 구체적 실상에 직결시켜 다루지 않고 말만 갖고 관념적으로 다루면 본질이 왜곡되고 나아가 혼란스럽게 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있는 사실대로 알아본 내용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불교이지만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관념화됩니다. 그 불교 언어를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관념적으로 다루면 불교의 본래의도가 왜곡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듣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부처의 실상을 모르고 말에 따라 허망한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실상과는 관계없이 전도몽상 즉, 자기가 갖고 있는 선입견 또는 관념대로 생각합니다. ‘업장덩어리인 내가 감히 부처라니, 말도 안돼!’ 하고 스스로를 비하합니다. ‘맨날 미워하고 욕심부리고 하는 하찮은 존재인 내가 어떻게 부처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부처는 아주 특별한 존재, 거룩한 존재라는 추상적이고 관념화된 언어에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태도가 자신이 본래부처임을 사실대로 받아들이는데, 아주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관념들 즉, 허망한 분별망상을 타파하기 위해서 옛 선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착각하지마, 부처가 벌거 아니야, 부처도 눈이 두 개야, 우리와 다를 것이 없어, 너희들도 눈이 두 개잖아, 보고 걸어다니는데 눈 두 개 발 두 개면 충분하잖아, 부처도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걸어다니는 거야’ 하고 말입니다. 부처도 우리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가르침을 믿지 않습니다. 부처는 특별한 존재라는 관념들이 우리를 주눅들게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을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이 모두가 언어를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관념적으로 다룬 결과입니다. 언어를 잘 모르고 잘못 다루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것이지요. 사실 언어로 표현되어진 모든 개념들은 반드시 그대상이 있습니다. 사실이든 관념이든 현상이든 본질이든 내면이든 외면이든 대상에 의지해서 개념이 만들어 집니다. 그러니까 모든 개념은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언어를 다룰때에는 역사를 알고 그 역사에 맞게 해야합니다. 즉 중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언어가 사상과 정신을 담는 거룩한 그릇, 삶의 문제를 풀어내는 거룩한 도구가 되는것이지요. 부처가 여어자, 실어자, 불이어자, 불망어자(如語者, 實語者, 不異語者, 不妄語者)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가 ‘일과 수행이 하나되는 삶’입니다. 보통 불교는 수행해서 부처되는 가르침이라고 설명하고, 우리들도 너나없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열심히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해서 부처된 다음, 부처로 살려고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불교수행에 대한 사고와 신념을 정밀하게 따져보면, 불교를 공부한 다음 수행을 하고 수행한 다음 깨닫고 그 다음에 부처로 살아가는 네 단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불교수행의 실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스스로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과 수행이 따로따로가 됩니다. 분리시켜 생각하는 한, 늘 원인과 결과, 과정과 목적이 항상 두 개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개로 나누는 관념적 지식과 믿음 때문에 일과 수행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행과 일 또는 삶이 이원화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본래부처론으로 보면, 수행해서 새로 부처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부처인데 무슨 수행이 따로 필요하며 다시 부처되려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직면한 존재의 실상이 본래부처이므로 그 밖에 달리 더 추구하고 더 얻고 더 깨닫고 더 소유할 것이 애초부터 있지 않습니다. 수행해서 깨닫겠다고 하는 분리된 사고를 할 것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그대로 본래부처의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본래부처’인데 새삼스럽게 수행을 해서 다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소를 타고 있는데 다시 소를 찾으라고 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잘 알다시피 대승불교는 ‘본래부처론’을 주장합니다.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당장 부처로 살자는 논리이지요. 이 소식을 승찬선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오직 분리시키는 사고를 꺼려한다. 다만, 분리시켜 미워하거나 애착하지 말라. 그러면 확 트인 하늘처럼 명명백백하다” 이런 점이 대승불교의 특징이고 탁월성입니다. 초기불교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만, 이 논리를 초기불교와 연결시켜서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존재의 실상, 생명의 실상, 본래부처, 본래면목의 문제를 팔정도로 이야기해봅시다. 존재의 실상을 논리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연기법이라면, 실천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중도입니다. 그러니까 존재의 실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연기법이고, 실천적으로 설명하면 중도인 것이지요. 잘 알고 있듯이, 중도의 내용은 팔정도입니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지요, 여기에서 제일 먼저 명확하게 정리해야할 것이 올바름(正)의 뜻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인들은 팔정도의 중요함을 끊임없이 강조하지만, 올바름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천착하지 않습니다. 사실 엄밀하게 볼 때, 올바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팔정도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팔정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름의 뜻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중도’를 설명할 때, 이것과 저것, 있음과 없음 등의 양극단을 벗어난 상태라고 합니다. 존재의 실상에 어긋나는 물질만능도 정신만능도 체제와 제도의 만능도 모두 극단이므로 벗어나야 합니다. 왜 양극단에 빠져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존재의 실상인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지요. 왜 양극단을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요? 실상에 일치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왜 실상에 일치되도록 해야하지요? 실상대로 해야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볼 때, ‘중도’란 존재의 실상, 생명의 실상, 본래면목,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알아보고(如實知見) 사실대로 실천함(如實知見行)을 뜻하지요.
 하나의 예로 정법불교와 삿된 불교를 갖고 올바름의 의미를 다시 천착해 봅시다. ‘삿된 불교’란 정법불교에 대한 상대적 개념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삿된 견해’란 중생의 견해이고 ‘바른 견해’란 부처의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부처의 견해와 중생의 견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부처의 견해는 매 상황, 매 순간마다 존재의 실상에 대해 사실대로 알아보는 견해입니다. 실상을 있는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이 부처의 견해이고 정견입니다. 중생의 견해는 어떤 것일까요? 전도 즉, 실상을 거꾸로 보는 견해, 실상을 뒤집어서 보는 견해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견해이고 삿된 견해입니다. 여기에서 정리되어야할 것이 실상의 내용입니다.
 먼저 ‘무아’에 대해 말해봅시다. 존재의 실상을 공간적 관점에서 개념화시킨 것이 무아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분리/독립되어 있지 않다. 시간/공간, 내면/외면, 정신/물질, 개인/전체, 인간/자연 등 어떻게 봐도 실상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마치 그물의 그물코처럼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하고 있다’ 저간의 소식을 화엄경에서는 ‘제망중중무진연기(帝網重重無盡緣起)’ 라고 했습니다. ‘제망’은 비유입니다. 즉, ‘인드라망’입니다. 제석천의 구슬그물입니다. 내용은 상하좌우 겹겹으로 무궁무진하게 상호의지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존재의 실상입니다.
 다음은 ‘무상’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들은 보통 ‘무상’하면 “인생이 허무해, 가을은 쓸쓸해” 등 감상적인 느낌을 말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의 뜻은 존재의 실상을 시간적 관점에서 개념화시킨 것이 무상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모든 존재들이 서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실상의 내용입니다.
 물론 무상과 무아는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상이 드러나면 무아가 보이지 않게 함께하고, 무아가 드러나면 무상이 보이지 않게 함께하고 있습니다. 무상, 무아인 존재의 실상을 있는 사실대로 보는 것이 정견이며, 부처의 견해이고, 정법불교입니다. 그런가하면, 실상이 분리/독립되지 않았는데 분리·독립되었다고 생각하고, 고정/불변하지 않았는데 고정/불변하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삿된 견해이고 중생의 견해이며 삿된 불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부처님이 수행을 해서 존재의 실상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보니 세상은 본래부터 있는 진리인 연기법으로 이루어져 있더라’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내용은 뭔가 하고 보니 ‘분리/독립되어 있지 않고, 고정/불변하지 않더라’ 이런 이야기이지요. 그 연기법을 객관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존재의 실상, 생명의 실상이고 인격 또는 주체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본래부처, 본래면목입니다. 옛 스승들께서는 본래부처, 본래면목, 존재의 실상, 생명의 실상 등을 ‘일원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지금은 일원상을 원불교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본래는 옛 선사들이 즐겨 사용해 왔습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더 구체화시킨 것이 생명평화로고입니다. 일원상 또는 생명평화로고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서로 의지해서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서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서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신을 화엄경에서는 ‘제망중중무진연기법’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차이들이 있지만,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과 화엄경에서 말하는 연기론의 차이는 없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연기법을 평면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좀 단순하고, 화엄경에서는 중중무진 연기를 인격화 시켜서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설명하기 때문에 훨씬 더 복잡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다만 화엄경에 오면, 인격화 되어지고 더 풍부해집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법신, 보신, 화신, 산신, 목신, 일천자, 월천자 등으로 인격화 됩니다. 또 십현연기설(十玄緣起說) ․ 육상원융설(六相圓融說) ․ 사무애법계설(四無礙法界說)이 있습니다. ‘십협연기설’은 존재의 연기를 열가지로 설명하고, ‘육상원융설’은 존재의 원융함을 여섯가지로 설명하며, ‘사무애법계설’은 존재의 무애를 네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 설명은 너무 복잡하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이쯤에서 로고를 팔정도로 설명해 봅시다. 그 뜻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첫째가 ‘정견’이지요. 정견이란 일원상 또는 생명평화로고로 표현되고 있는 존재의 실상을 있는 사실대로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실상의 내용인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무상’, 분리/독립된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무아’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것이 정견이요, 정견이 바로 부처의 견해이지요. 대부분 정견을 거쳐서 부처의 견해로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자체가 부처의 견해이지 달리 부처의 견해가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입장에서 말하면, 삶의 현장에서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닦는 것이 ‘정견수행’이요, 그대로 깨달음의 수행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사유’인데, 정견의 경우처럼 실상대로 사유하는 것이 ‘정사유’이고 그것이 부처의 사유입니다. 그 밖의 부처의 사유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삶의 현장에서 사유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사유의 수행이요, 그대로 깨달음의 수행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정어’입니다. 실상에 근거하고 그 이치에 맞게 말하는 것이 ‘정어’이지요. 금강경에 “여래는 사실대로 말하는 자, 진리대로 말하는 자, 진리와 다르게 말하지 않는 자,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 허망한 말을 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물론 구체적으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폭언을 하지 않는다” 등의 설명을 합니다. 앞에서처럼 실상대로 말하는 ‘정어’가 그대로 부처의 언어입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하면, 일상적으로 언어를 바르게 갈고 닦는 것이 ‘정어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입니다.
 네 번째는 ‘정업’인데, 실상에 맞게 행위하는 것을 뜻하지요. 앞에서처럼 실상에 맞게 행위하는 것이 ‘정업’인데, 그것이 바로 부처의 행위이지요.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일상적으로 행위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업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정명’인데, 실상의 정신에 일치하는 생활을 위한 직업, 또는 실상에 일치하는 직업생활을 의미하지요. 앞에서처럼 실상에 맞게 직업생활을 하는 것이 정명입니다. 부처님의 생활도 그런 것이지요. 수행의 관점에서 말하면, 일상적으로 생활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명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정정진’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실상에 일치하는 바른 견해, 사유, 언어,  행위, 생활, 깨어있음, 집중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갈고 다듬는 노력을 ‘정정진’이라고 하지요. 바른 견해를 위시로 해서 바른 집중 등이 보다 더 선명해지도록 줄기차게 노력하는 것이 정정진수행이요, 그것이 바로 부처의 정진이기도 하지요.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일상적으로 노력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정진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정념’입니다. 정념은 무엇일까요? 실상에 맞게 깨어있음, 정신차림 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에는 존재의 실상에 대해 항상 잊지않음, 또는 기억함이라고 배웠습니다. 요즘 부처님께서 직접하신 수행은 “위빠사나다” 또는 “사마타다”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많은데, 그렇게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의 실상에 입각해서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어느 하나만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굳이 부처님이 몸소 실천하시고 가르치신 수행을 말해야 한다면, ‘팔정도’라고 해야 마땅하지요. 앞에서처럼 실상에 맞게 언제나 깨어있음, 정신차림, 기억함, 잊지 않음을 실천하는 것이 ‘정념’인데, 그것이 그대로 부처의 깨어있음입니다. 그 밖에 부처의 깨어있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일상적으로 깨어있음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념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입니다.
 여덟 번째는 ‘정정’입니다. 불교인들이 ‘정정’을 정신집중, 정신통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정신집중과 정신통일하고는 무엇이 다르지요? 불교에서 삿된 선정, 바른 선정이라는 말은 왜 생겼을까요? 부처님도 수행과정에서 고도의 정신집중, 정신통일의 선정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도 존재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았고, 고통으로부터의 해탈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길을 버리고 스스로 중도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런 점 때문에 불교에서는 단순한 정신집중, 정신통일을 ‘삿된 선정’이라고 합니다.
삿된 선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마왕파순’입니다. 반면 언제어디에서나 한결같이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의 흔들림없는 상태를 ‘바른 선정’이라고 합니다. 바른 선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법왕, 즉 부처입니다. 마왕파순과 부처의 경지를 보면, 마왕은 다섯가지 신통을 하고 부처는 여섯가지 신통을 합니다. 다섯가지는 마왕과 부처가 똑같습니다. 다만 번뇌가 다 소멸된 상태인 ‘루진통’ 또는 미세한 번뇌가 없는 상태인 ‘무루통’ 한가지만 다릅니다.
 마왕은 삶을 고통과 불행의 함정으로 몰고 갑니다. 부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탈, 즉 자유, 평화, 행복의 삶을 살게 합니다. 삿된 선정과 바른 선정의 결과가 이처럼 하늘과 땅만큼 차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올바름의 문제입니다. 올바름이 없는 단순한 정신집중, 정신통일은 삿된 선정이고, 그 결과는 파멸의 마왕이 됩니다. 반대로 올바름이 있는 집중, 통일은 바른 선정이고, 그 결과는 해탈자재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삿된 선정이 얼마나 잘못되고 위험한 것인지, 바른 선정이 얼마나 중요하고 확실한 것인지가 확연합니다. 앞에서 일관되게 바름의 의미는 존재의 실상에 근거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존재의 실상에 근거하지 않는 견해를 위시로 한 집중 등이 모두 중생의 살림살이요, 삿된 살림살이에 불과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반복됩니다만, 올바른 선정이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의 실상에 일치하는 견해, 사유, 언어, 행동 등이 한결같이 흔들림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실상에 맞게 언제나 흔들림 없음, 동요하지 않음, 즉 성성하게 깨어있음이 여여부동한 상태가 바른 선정이요, 그것이 바로 부처의 선정입니다. 그 밖에 부처의 선정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일상적으로 흔들림 없음, 동요하지 않음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정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입니다. 불교수행을 실상대로 관찰해보면,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알아보고 사유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고 노력하고 깨어있고 흔들림없음이 부처의 삶입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일과 수행, 삶과 수행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분리되면 이미 불교가 아니며, 불교를 잘못하는 것이지요. 분리되면 온전한 삶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수행한 만큼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지요. 나날이 확신이 깊어지고, 흔들림이 없고, 삶이 더 단순소박해질 수가 없지요.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교와 수행, 수행과 일, 수행과 삶이 하나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나되지 않고 분리되는 한, 아무리 불교공부와 수행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또 다른 전도몽상에 불과함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다음은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을 바른 견해와 연결시켜서 이야기해 보지요.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의 세계관과 가치의식과 그리고 현재의 상태를 제대로 보고 이해하지 않고도 인드라망 운동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하지요. 바른 선정도 똑같습니다.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의 내용에 대한 내 이해와 인식과 신념이 흔들려버리면, 어떻게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의 실상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념이 흔들림없이 늘 견지되고 유지되는 것, 이것이 ‘정견’이고 ‘정정’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비심이 흔들리지 않는 것, 서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 것, 너와 나는 한 몸, 한생명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흔들림 없는 것, 이것이 정정입니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볼 때, 생활과 불교수행, 일과 불교수행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도 모르고 불교도 모르는 것이며, 일도 제대로 못하고 불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됩니다.
 불교수행은 항상 직면한 현재의 삶을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이와 같은 정신을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직면한 중생고를 싫어하거나 회피하지 않아야 보살행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장좌불와를 하고 십년면벽을 한다고 하더라도 직면한 현재의 삶을 떠나서 정견과 정정의 삶이 가능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자신의 실상 또는 현재의 삶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는 것, 여실하게 사유하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한 다음 수행을 하고, 수행한 다음 깨닫고, 깨달음을 얻은 다음 부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처니까 지금 당장 부처로 사는 삶이 팔정도의 삶인 것이지요. 현재의 실상을 제대로 보고 사유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고 노력하고 깨어있고 흔들림없으면, 그것이 부처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불교는 부처되는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본래부처이므로 지금 당장 본래부처로 살자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의 삶이라 했고, 대승불교의 보살행에서는 동체대비의 삶이라 했고, 선수행에서는 대무심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기왕에 대승불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초기불교논리와 대승불교를 연결시켜 이야기해 봅시다. 대승불교에서 천명하는 내용을 한마디로 ‘보살도’라고 합니다. 보살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선수행이고, 또 하나는 보살행입니다. 선수행은 주체적 입장에서 자타를 함께 완성시키는 실천론이고, 보살행은 상호관계 속에 자타를 함께 완성시키는 실천론입니다. 연기법의 세계관의 입장에서 너와 나의 관계를 주체로 용해시켜 실천하는 것이 선수행이라면, 나라는 주체를 너와 나의 관계에 용해시켜 실천하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대비행과 무심행도 같은 내용입니다.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분리된 사고를 넘어 통일적 사고인 무심의 사고를 하게 됩니다.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대립적 사고를 넘어 함께하는 사고인 대비행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굳이 나누자면, 무심행은 선수행의 입장이고 자비행은 보살행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부처론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연기법은 본래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석가가 출현하고 출현하지 않고에 관계없이, 싯타르타가 깨닫고 깨닫지 않고에 관계없이 본래부터 있는 법, 스스로 존재하는 법이라고 합니다.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연기법에 의해 세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소식을 초기 경전에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서로 변화하면서 이 세상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내용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라는 것이 먼저 있고, 나중에 ‘저것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단히 위험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계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저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계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관계에 의해서 존재하고, 몸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결국 연기법에 의해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이것을 인격화시킨 것이 본래부처론입니다. ‘나는 본래부터 있었던 연기법에 의해서 이루어진 존재다. 스스로 존재하는 진리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본래부처인 것이다. 지금 여기 내가 진리의 존재, 연기법의 존재라면,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이 세상 그 무엇도 본래 분리되어 있지 않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본래부터 서로 의지하고 서로 변화하면서 존재한다. 본래 나이면서 너와 함께이고, 너이면서 나와 함께이다. 개체이면서 전체와 함께이고, 전체이면서 개체와 함께이다’ 그러므로 주체적이면서도 함께의 길을, 함께이면서도 주체의 길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견지해온 관점과 문제의식으로 생명평화로고를 갖고 전체적으로 정리해 봅시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실상은 연기, 무아입니다. 자타(自他)/진속(眞俗 )이 불일불이(不一不二)입니다. 어떤 형태로 확인해보아도 분리되어 있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존재합니다. 엄연한 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동체 즉 한 몸, 한 생명이지요. 한 몸, 한 생명을 알게 되면 그 다음은 그 내용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자비이지요. 온 우주를 다 둘러보고 뒤져보아도 자비의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제대로 보고 알게 되면, 죽으나 사나 함께 살려고 하게 되지요. 바로 공동체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길이 무엇입니까? 서로 더불어 함께 사는 길이지요. 상호의존의 진리에 따라 기꺼이 스스로 본래부처로 존재하는 ‘무아행’인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본래부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본래부처로 대접하는 ‘보살행’인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본래부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진리의 길, 본래부처의 길에 어긋나는 길인 자기만 내세우고 자기 것으로만 쌓아 모으고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하면, 서로 어울려 함께 사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진리의 길, 본래부처의 길에 어긋나는 길인 상대를 무시하고 배려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서로 도우며 함께 사는 일이 이루어질 수가 없지요. 실상을 제대로 알고 보면, 우리가 갈 길은 죽으나 사나 진리의 길, 본래부처의 길인 함께 사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화엄경에서도 부처를 정의해서 ‘동체대비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지혜와 자비의 존재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본래면목, 본래부처의 모습이 인드라망처럼 존재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 이것이 지혜이고, 그 내용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자비이지요.
 구체적으로 본래부처의 자비는 어떤 것일까요? 겨울의 추위, 봄의 따뜻함, 여름의 더움, 가을의 시원함이 생명을 낳고 길러냅니다. 생명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하는 겨울의 겨울다움, 봄의 봄다움, 여름의 여름다움, 가을의 가을다움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무심의 자비, 우주의 자비입니다. 우주의 자비를 진리의 정신대로 조건없이, 또 머무름없이 주체의 삶으로 실천하고 누리는 것이 자비로운 무심의 삶이고, 상호관계의 삶으로 실천하고 누리는 것이 무심한 자비의 삶입니다.
 
 다음은 좀 더 구체적 내용인 탐욕과 집착의 문제를 다루어 봅시다. 먼저 집착에 대해 말해 보지요. 존재의 실상이 상호변화인데도 실상에 대해 무지하므로 서로를 분리, 고정시키는 자아중심의 고정된 사고를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집착과 고통을 낳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집착과 고통을 벗어나려면, 실상이 끊임없는 상호변화임을 직시하고 실상에 일치하도록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해탈자재가 실현됩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볼까요? 어저께 누군가와 싸웠어요. 그 사람을 오늘 다시 만났습니다. 어제 싸울 때의 그 사람과 오늘 내가 만난 사람은 동일인지이만, 내용으로 보면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어저께는 나한테 욕설을 퍼부었지만, 오늘은 욕설을 퍼붓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저께 욕설을 퍼부어서 기분 나빴기 때문에 오늘 욕설을 퍼붓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저께의 그 감정으로 그 사람을 대합니다. 구체적 실상은 변화하고 있는데, 그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변화를 내 삶으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변화하는 실상에 맞게 일치되도록 하려고 한다면 어저께의 감정은 어제 그 자리에 내려놓고 오늘은 욕하지 않는 그 사람을 실상에 맞게 대해야 마땅하지요. 그렇게 하면, 미움, 화남으로부터 저절로 자유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무조건 집착하지 않아야 된다. 집착이 없어야 된다고 하는데, 단순히 의지의 결심만 갖고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길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존재의 실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다. 붙잡을래야 붙잡을 수가 없다. 어떤 것도 집착해야 할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엄연한 실상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이것이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존재의 실상에 대해 끊임없이 사실대로 이해하고, 사유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노력하고, 깨어있고, 흔들림없이 적응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다음은 탐욕에 대해 짚어봅시다. 존재의 실상이 상호의존하여 존재하는데도 실상에 대해 무지하므로 너와 나를 분리, 대립시켜서 자기중심의 이기적 사고를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탐욕과 고통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탐욕과 고통을 벗어나려면, 실상이 상호의존적임을 직시하고 실상에 일치하도록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의 만족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너와 나는 분리되어 있지 않아, 너와 나는 한 몸, 한 생명이야. 저 생명평화로고대로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야. 이 세상에 나 아닌 것이 없어. 내 생명과 무관한 존재가 없어.” 이렇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면, 이기적 탐욕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나만 잘 살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내세우고 고집할 수가 없습니다. 늘상 실상에 일치되는 이해를 갈고 닦는 것이 정견수행입니다. 실상에 일치하도록 사유하는 것이 정사수행입니다. 실상에 일치하도록 말하는 것이 정어수행입니다. 그 이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기적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집착과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도 그 출발점은 실상을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같은 소식을 아함에서는 주체적으로 진리를 선택하고 진리에 따라 살면 그 삶이 평화롭고 자유롭다(法歸依. 自歸依. 法燈明. 自燈明)고 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과거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분리 ․ 고정된 실체를 얻을 수 없다 . 그러므로 실상에 맞게 그 어디 그 무엇에도 머무름없이 마음내고 보시하면 그 삶 자체가 해탈의 삶이다(三世心 不可得  無住相布施)” 라고 했습니다. 임재선사는 언제 어디에서나 주체적으로 진리를 선택하고 실천하면 언제 어디에서나 그 삶이 참되고 자유롭다(隨處作主 立處皆眞)고 했습니다. 매 상황 매 순간마다 주체적으로 진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수행이요, 중도수행이며, 올바른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수행이고, 수행이 삶이지요. 어떻게 살펴보아도 수행과 삶, 일과 수행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수행에 대해서 정리해 봅시다. 도대체 “수행, 수행”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수행일까요? 실제 수행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많은 설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래, 이것이야!”하고 와 닿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대해종고선사의 생처방교숙 숙처방교생(生處放敎熟 熟處放敎生)입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생소한 것은 내려놓아서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은 내려놓아서 생소하게 한다’가 됩니다. 수많은 정의들이 있지만, 이만큼 정확하고 명확한 정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낯선 것은 거듭거듭 친숙한 것이 되도록 하고, 친숙한 것은 거듭거듭 생소한 것이 되도록 하는 이것이 수행의 전부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면 대해종고가 제시한 수행론을 팔정도에 적용시켜 봅시다.
 먼저 익숙한 것이 무엇일까요? 실상은 무상, 무아인 본래부처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로 봅니다. ‘분리되어 있다.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본래중생이라고 믿습니다. 너따로 나따로 분리시켜서 자기중심의 이기적 사고를 합니다. 그리고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죽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상과 무아인 본래부처의 길과는 정반대로 사고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익숙한 것이지요. 아무도 가르쳐준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 데도 당연히 그런 것처럼 그렇게 합니다. 익숙해도 너무 익숙합니다.
 생소한 것은 무엇일까요? 익숙한 것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실상이 무상, 무아인 본래부처임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지요. 이것은 너무 생소합니다. 낯설고 이해도 잘 안됩니다. 연기, 무아, 자타불일불이, 진속불일불이, 본래면목, 본래부처로 표현되어진 존재의 실상을 사실대로 보고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사실대로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노력하고 깨어있고 흔들림없고 하는 이런 것이 너무 낯설고 생소하지요. 맨날 배우고 듣고 하지만, 왠지 친숙해지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영원히 불가능할 것처럼 잘 안됩니다. 그렇지만 생소한 것을 죽어라하고 내려놓고 죽어라하고 익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생소한 것을 생활화, 체질화해서 익숙하게 하는 것이지요. 즉, 본래부처의 삶인 팔정도를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수련하여 익숙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여 익숙해지면, 얼음이 녹아 흐르듯이 흙기와가 해체되듯이 저절로 무명업식이 녹아나고 해체됩니다. 이런 상태를 일러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되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해야할 때까지 왔습니다. 최종적으로 정리해서 매듭을 지어 봅시다. ‘세상은 연기법 즉, 관계의 진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지금 여기 ‘나’라고 하는 존재도 관계의 진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존재다. 이 사실을 인격화시켜 표현한 것이 본래면목, 본래부처 이다. 진리에 의해 태어난 본래부처인 지금 여기 ‘나’는 어떤 존재인가? 무상, 무아의 존재이다. 무상, 무아의 존재이므로 그 사실을 제대로 보는 것, 사유하는 것, 말하는 것, 그것이 본래부처가 현재의 삶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새롭게 부처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부처인 무상, 무아대로 보는 것, 사고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이것이 본래부처의 삶이 현현함이다’ 이 소식을 관계론적으로 말하면 동체대비의 삶이고, 주체화시켜 적용하면 대무심의 삶이 됩니다. 정리한 내용을 놓고 보면, 삶과 수행, 일과 수행은 결코 분리시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내용이 이런데도 수행과 일, 삶과 수행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교수행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도 자신이 했던 6년고행과 선정수행을 “성스러운 길이 아니다”라고 하며 버리고 떠났습니다. 삶과 수행, 일과 수행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수행이란 늘 지금 여기 직면한 현실의 실상을 사실대로 잘 보고 사실대로 잘 다루는 것입니다. 거듭되지만, 그 실상은 연기, 무아, 본래면목, 본래부처, 인드라망, 한 몸, 한 생명입니다. 분명한 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사유하고 음미해야만 삶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삶이 수행이 되고 수행이 그대로 삶이 됩니다. 이렇게 살고 이렇게 수행하는 길을 열어가고자 우리들은 인드라망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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