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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 10주년 첫번째 정기법회 - 도법스님 법문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22:48 63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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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적 위기 상황에서 불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또는 위기상황에 처해있는 현대문명에 대해 사회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길이 뭘까. 이런 두 가지 문제의식에 의해서 인드라망생명공동체운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불교 자체적으로 대안을 찾고자 하는 일이고, 사회적으로는 문명사적 대안을 찾고자 하는 문제의식 이었습니다.
 굳이 불교계의 대안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이 운동을 준비할 때 전국을 다 순례했습니다. 본사 주지스님들 다 만나고, 불교계에서 우리 스스로도 대안을 찾아내고, 사회적으로도 대안을 만들어갈 수 있는 불교를 만들어보자 생각했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98년 종단사태가 벌어지면서 준비했던 일들이 다, 태풍에 낙엽이 쓸려가듯이, 다 쓸려가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고민했던 소수의 친구들이 운동을 계속 해야 된다 해서 지금까지 온 셈인데요, 그 동안의 10년 세월을 되짚어보면, 사실은 제가 한 역할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인연들이 모아진 것은 맞지요. 스님들이 많이 도우셨고, 실상사에서도 많이 관심 갖고 참여해주셨고, 재가불자 중에서도 관심을 갖고 함께 해주신 분들도 계시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실무활동가들의 정말 피눈물나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실질적으로 특별히 도와주는 이가 없는데도 역시 그런 힘에 의존하지 않고, 아주 바닥에서, 그야말로 개미군단 하나하나들 모아서 활동했고, 그런 세월로 10년 세월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래서 활동가들한테 늘 미안하고 한편 고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사실 전 실제로 한 역할이 별로 없는 셈입니다. 그냥 바깥에서 보이기엔 ‘도법스님이 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어있는데, 실제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조금 서운한 것, 아쉬운 것을 생각한다면, 제가 종단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런 일을 하다보니까 제가 움직이는 것은 모두가 정치적 행위로 판단 규정지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정치적 의도 없이 순수하게 운동을 한다고 해도 늘 그런 의심을 받고, 또 그로 인해서 때에 따라서는 실제 활동가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그런 안타까움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대안문명ㅡ불교적 대안, 사회적 대안ㅡ을 찾고자 하는 절실한 염원들을 갖고 정말로 인내와 인내를 거듭하면서, 그야말로 인고의 세월을 애써 잘 극복해 준거죠. 이런 의미에서 그동안 스님들이 도와주고, 어른들이 도와주고, 특히 활동가들의 수고에 대해서 함께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동안 수고했고 앞으로도 잘 하라고 격려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인드라망이 만들어져왔다는 것이 지금생각하면 오히려 잘됐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동단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생력과 자립성입니다. 누구에 의존하지 않고 그야말로 그 뜻에 공감했던 개미군단들이 정성스런 마음을 갖고 참여하고, 작지만 조금씩 성의있게 역할을 하고, 인드라망은 이런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단체인 셈인데, 그래서 저는 오히려 어려운 조건 속에서 활동해온 것이 활동하는 당사자들은 고생했지만 일로 봐서는 대단히 더 건강하고 바람직하고 내용도 훨씬 더 탄탄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해온 일들이 어떤 것일까. 여러 가지 복잡한데요, 아주 단순화시키면, 두 가지입니다. 서울에서도 활동이 이루어지고, 불교생협, 인드라망생협, 우리옷살림, 귀농학교, 작은학교, 온갖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그런 모든 활동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불교적 대안, 다른 하나는 사회적 대안입니다.
 
불교의 전통, 소위 대승불교에서 제시하는 인간상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보살의 마음이 있어야만 진정한 불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보살의 뜻이 없으면 스님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불교인일 수 없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이죠. 보살의 뜻이 있다면 스님이 아니라 해도 그것은 진짜 불교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대승경전에서는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의 인간상을 제시합니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의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출가보살과 재가보살들이 함께 해서 좋은 사회를 이룩해보자는 것이 대승불교의 운동인 셈이죠. 그것을 조계종단에서는 사부대중공동체라는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런 대승불교의 전통을 한 사찰에서, 즉 실상사라는 절을 중심으로 온전하게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함께하는 불교적 이상을 실현해보자, 그런 도량을 만들어보자, 그것을 저희들은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실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화엄학림도 이루어지고 화림원도 이루어지고 농장도 이루어지고 다양하게 이루어지죠.
 
불교의 세계관을 인드라망이라고 합니다. 인드라망이라는 말은 그물이라는 뜻이죠. 이 세상은 그물처럼 이루어져 있다, 낱낱 존재들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존재한다, 이것은 모두가 서로 의지해있고, 서로 관계를 맺어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인간과 자연, 또 사회와 나, 이웃과 나, 부모와 나, 이런 모두가 그물의 그물코들처럼 서로 의지하고 관계 맺어서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런 인드라망 세계관이 하나의 사회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사회적으로,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으로 사회를 만든다면 과연 그 사회가 어떤 모습과 어떤 내용일까, 생각해볼 때, 물론 그것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쉬운대로 예를 찾는다면, ‘이웃사촌’과 ‘품앗이’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는 전통적인 우리의 ‘농촌 마을 공동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농촌 마을 공동체는 첫째, 인간과 자연이 공존합니다. 이웃과 이웃이 공존하죠. 그렇게 생각했을 때 현대 도시문명사회가 갖고 있는 자기모순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대안을 찾아가려고 한다면 우리 시대 현실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했을 때, 바로 자연과 함께, 이웃과 함께 하는 ‘지역농촌 공동체 사회’라고 하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도시문명 사회, 또는 기계문명 사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문명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서울의 고향이 어디겠습니까. 아무리 서울이 오늘날 한국사회를 좌지우지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의 품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서울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농촌과 농업과 농민들의 수고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서울이라는 도시문명은 만들어질 수도 없고 유지되어갈 수도 없습니다. 서울은 자립해 갈 수 있는 능력은 절대 없는 곳입니다.
왜 그런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서울에서는 우리 생명의 조건, 생명에 필요한 조건을 한 줌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생명에 필요한 조건을 끊임없이 소비시키고 오염시키고 파괴할 뿐입니다.
가장 쉽게 예를 한번 들어보죠. 서울에서 자연과 지역과 농촌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생명에 필요한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기분 좋은 산소 한 호흡을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배고픔을 해결해줄 수 있는 밥 한 그릇을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더울 때 우리를 시원하게 해줄 수 있는 수박 한 덩이를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서울에서는 우리 생명에 필요한 조건은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농촌은 바로 도시문명의 뿌리이기도 하고, 고향이기도 하고, 모체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도시문명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도시인들의 생명줄을 책임지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밥 먹지 않고 부처노릇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린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들이니까, 어떤가요. 천하 없는 부처도 밥 먹지 않고는 부처노릇 할 수가 없습니다. 천하 없는 총림이네, 선방이네, 사찰이네, 도량이네, 수행장이네 한다 해도 밥 먹지 않고서는 총림도, 선방도, 사찰도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밥 먹지 않고서는 대통령도 할 수 없고, 청와대도, 서울대학도, 신문방송사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농촌과 농업은 바로 도시문명의 하느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도시문명의 뿌리일뿐만 아니라 원천이기도 하고 고향이기도 하고, 그렇다는 얘기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마치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함부로 취급하듯이, 도시문명을 낳고 길러낸 농촌과 농업, 도시문명의 모체이기도 하고 고향이기도 한 농촌과 농업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천시하고, 함부로 하고,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부모를 내팽개치고 함부로 하면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후레자식이라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후레자식인 셈입니다. 엄정하게 하면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그래서 농촌에 대한 대안을 찾자는 것은 농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너무나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으로 파멸해가고 있는, 자기모순과 자기함정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내고 있는 도시를 구제하기 위해서라도 농촌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을 구제하는 길이 농촌사회에 대한 대안을 찾는 일이라고 저희들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과 함께, 이웃과 함께, 정말로 인간적으로 소박하게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농촌공동체를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게끔 해보자, 하는 것이 인드라망이 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불교집안에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사회에서는 굉장히 큰 관심을 갖고 있고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관심을 갖고 주목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지금 우리가 생명운동, 환경운동, 대안운동 하면서 여기저기서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부분 서양 쪽에서, 선진국 쪽에서 배워온 것들입니다. 우리 세계관과 철학으로 문명사적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으려고 하는 움직임들은 별로 없습니다. 비록 인드라망이 규모는 작지만 내용을 보면 바로 우리 세계관과 철학을 갖고, 우리 삶의 문제를, 우리 시대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굉장히 주목하고, 뜻있는 사람들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관심을 갖는 부분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객관적인 평가에 의해서 인드라망이 몇 개의 상을 받습니다. 교보생명의 환경상도 받고, 불교계의 불이상도 받고, 포스코 청암상도 받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적 평가라고 봐도 좋겠죠. 이렇게 보면 인드라망 10년이라는 것은 비록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굉장히 의미있는 실험들이었고, 어쩌면 우리의 능력과 노력에 비해서 상당히 눈부시게 성장해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계속 진행중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해온 일들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끝으로, 오늘 주제가 ‘생명평화의 눈으로 본 세상살이’ 이렇게 되어있는데요, 최근에 저는 생명평화라는 화두를 갖고 2004년부터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생명평화의 눈으로 본 세상살이를 얘기하려면, 도대체 생명평화의 눈이라는 것이 뭘까, 어떤 의미일까, 사실 이 부분부터 정리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불교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개념이 ‘인드라망생명공동체’라면, 범종교 시민사회가 함께 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된 개념이 ‘생명평화’입니다. 더 불교적으로 얘기하면 화엄의 세계관과 철학을 갖고 지금 여기 내 삶의 문제를, 또는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자 하는 것이 생명평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중도라고 이야기하죠. 부처님은 중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상당히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나의 가르침은, 나의 진리는, 누구나, 눈 있는 자는 누구나 여기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현되어진다, 증명할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심오한 진리라 하더라도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실현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우리가 배운 불교가, 또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과 신념이 과연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실현될 수 있도록, 증명될 수 있도록 다루고 있는가. 이렇게 짚어보면, 우리는 정말로 중도적으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금방 확인하게 됩니다.
 
중도라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말은 지금 여기 현실, 현장성, 주체성, 역동성을 갖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면 중도적 사유방식으로 생명평화의 눈이 어떤 것인지 잠깐 정리를 해보죠.
지금 여기 내 삶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이죠, 그렇죠. 그러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뭐겠습니까. 생명이죠. 지금 여기 내 생명이 살아있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의미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국가도, 종교도, 민족도, 이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그 무엇도. 자유, 정의, 평화, 꿈, 사랑, 이상, 그 어떤 것도 지금 여기 내 생명이 살아있지 않는 한 아무 의미를 가질 수가 없고 추진해 갈 수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 내 생명이 살아있을 때만 이 세상은 나에게 존재 의미를 갖습니다. 지금 여기 내 생명이 살아있을 때만 우리가 정치도 할 수 있고, 종교도 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고, 꿈도 가질 수 있고, 또는 자유, 정의, 평화도 모색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가장 현실적으로 절실하게 중요한 가치는 내 생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떤 것도 내 생명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는 없습니다. 어떤가요?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기독교든, 불교든, 미국,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자본가든, 노동자든.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나에게 그러하듯이 너에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은 몇 개입니까? 하나죠.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될 가치가 있다면 내 생명이죠. 그러면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죠. 국가, 민족, 종교, 이념,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는 가치가 내 생명이라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뭐겠습니까. 현실적으로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내 생명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내 생명이 어떻게 생겼죠? 어디에 있죠?
이렇게 우리 삶의 문제를 짚어가 보면, 우리는 불행하게도 하나밖에 없는 내 생명,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될 내 생명,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는 가치를 갖고 있는 내 생명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고,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거 기가막힌 일이죠. 다른 건 다 다음에 해도 괜찮고 잘 몰라도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내 생명만큼은 가장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다뤄가지 않겠습니까. 이는 마치 옷을 입는 것에 비유하자면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는 일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다음 단추를 계속 끼워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무지무지하게 노력은 하는데 문제는 계속 뭔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혼란스러워지고, 위험해지는 이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삶을 불교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평화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온통 전도몽상 속에 싸여 있습니다. 이게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공통성입니다. 제가 한 이만오천리 정도 걷고, 칠만명 정도의 사람을 만났는데, 대화해보면 우리 문제는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삶을 중도적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렇다는 것이죠.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잘못 다루고 있다, 이로 인해 결국 노력하는데 문제를 풀지 못하고 계속 꼬이게 만들어가는, 또 어렵게 만들어가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겁니다.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왜 그렇게 전도몽상 얘기를 많이 했는지, 왜 부처님께서 인생살이가 대부분 다 전도몽상에 빠진 삶이라고 얘기했는지, 아주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몽상에 빠져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하는 일, 그 전도몽상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일, 이것이 불교가 할 일이고 스님들이 할 일이겠다, 이런 생각을 거듭거듭 확인하면서 걸어온 것이 그동안의 순례길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고, 최근에 운하 때문에 강을 순례하고 있는데, 거기도 문제 의식은 비슷합니다. 그 중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정리하겠습니다.
 
운하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논리는 몇 가지로 딱딱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운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중에서 한 가지만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돈을 벌려는 이유도 아름답게 집도 꾸미고, 삶도 아름답게 살고, 그러기 위해서 돈을 벌겠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내용을 보면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보다 더 뛰어나게 인간이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순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고도의 예술성을 갖고 뭘 해낸다 하더라도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거죠.
그런데 운하는 어떤 생각인가. 바로 인간으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자연이 만들어낸 강이라는 아름다움을 쳐부수고 운하를 만들어서 돈 벌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겠다, 이런 사고방식이에요. 어떻습니까, 계산이 맞습니까? 이건 뭘 의미하냐면,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특히 운하를 추구하겠다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움의 가치에 대해서 무지한가, 얼마나 그들이 갖고 있는 가치의식이 잘못되어있고 천박한가를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이라는 거죠. 강을 걸어보면 그건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없는 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부수고 돈을 벌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추구하겠다는 이 사고방식이 제대로 된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건 정말로 참 기가 막힌 일이죠. 그래서 저는 다른 건 복잡하니까 놔두고, 이 아름다움에 대한 무지, 아름다움에 대한 왜곡된 사고방식, 이것이 한국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한국사회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일이 운하사업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집을 짓는 것만 봐도 압니다. 여기에 집을 지을 때는 자기들 편리한 것만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거죠. 저쪽 집에서 바라봤을 때 이 집이 아름답게 지어져야 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고 나에게도 도움이 되잖습니까. 반대로 저쪽에서 집을 지을 때는 이쪽 집에서 볼 때 아름다울 수 있도록 지어져야 본인에게도 유익하고 그 사람에게도 유익합니다. 서로서로간의, 또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상대가 어떻게 보느냐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 내가 편리한 것이면 뭐든지 해버립니다. 그것이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을 파괴하든지 말든지, 우리가 함께 공유해야 할 아름다움을 파괴하든지 말든지. 얼마나 우리가 무례한 인간이 되어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죠.
이 아름다움의 의미, 아름다움이 지니는 가치에 대한 무지가 운하 문제로 나타나고 있고, 이건 우리 삶이 얼마나 천박해져있고,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운하문제에 대해서 이 아름다움의 가치를 놓고 볼 적에 운하 문제는 그야말로 모두가 자기 자신의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그래서 모든 사람이 운하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운하문제를 계기로 해서 내 삶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천착해보는 그런 기회로 가져가는 게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 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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