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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 10주년 첫번째 정기법회 - 성전스님과 대화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22:50 65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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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스님(이하 성전) : 저는 오늘 여기 들어오면서 이 사진을 계속해서 주목해 봤습니다. 아스팔트가 깔려있는 도로와 그 한 곁에서 책을 읽고 있는 도법스님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배치되고 있는 것 같아서 제 나름대로 이 그림의 상징성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이 도로라는 것이 그렇죠, 획일성, 그리고 속도. 이런 것으로 상징되는 현대문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옆에 책을 보고 있는 도법스님은 그러한 획일성과 속도로만 치닫는 현대 사회를 향해서 사색과 명상으로 조용하게 저항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경책하고 있는 사람. 그래서 조금은 외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문득 해봤습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도법스님(이하 도법) : 역시 방송진행자는 다르네요.
 
성전 : 도법스님은 제가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사람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제가 스님을 안 지는 꽤 됐습니다. 그 때마다 보면서 아, 저렇게 사는 스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일탈이고, 어찌 보면 파격이고, 어찌 보면 승화일 수 있는 이런 모습들에 대해서 종단 내부에서도 평가가 분분하고 또한 다양합니다. 근데 특이한 점은 무디어서 그런지 별로 그런 평가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쓴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들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차림새를 좀 보십시오. 이렇게 깨끗하게 차려입은 저하고 얼마나 많이 다릅니까. 근데 말이죠, 저는 깨끗하게 입었지만, 얕고 또 뭐랄까, 깊이가 없는데 반해서 도법스님은 저렇게 허름하게 입었어도 상당히 깊이도 있고 넓이도 굉장히 많이 가지신 분입니다.
제가 쭉 옆에서 보면서 놀란 점은, 이렇게 어린 우리들이 덤벼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해와 설득, 논리를 가지고 대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후학들을 대하는 가장 예의바른 자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면에서 도법스님은 정말 흠모해도 좋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여기 오신 분들도 다 도법스님에 대한 그런, 어떤 흠모의 마음이 있으셔서 오셨겠죠? 그렇죠?
굉장합니다. 저보고 오신 분들은 안계실테고.
도법스님은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다, 스님이기 이전에 그의 심성이 정말 좋다, 뭐 운동권이다, 강성이다, 빨갱이다, 이렇게 말하는 스님들도 많이 있지만, 제가보기에는 스님이기 이전에 굉장히 아름다운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제가 제일 먼저 물어볼 것은, 아마 여러분들도 이런 질문을 좀 같이 궁금해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여쭤보는데요, 보통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는 시간,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는데, 스님에게도 어떤 그러한 때가 있는지, 그런 감성이 살아있는지, 한번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법 : 아까 제가 아름다움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사실은 저는 그런데 별 관심이 없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름다움이 뭘까. 어떤 걸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저는 진실한 것, 성실한 것, 이런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다녀보니까,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라든가 이런 것이 아니더라구요. 정말 아름다운 삶을 만나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또한번 거기에 가고 싶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사람에 대한 진정성, 그리고 사람에 대한 그런 포용성, 이런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전 :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아마 도법스님을 개인적으로 접해보신 분들은 느끼시겠지만, 그런 것들이 확실하게 있습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야, 그게 뭐야! 하고 소리칠 텐데, 그러지 않으시더라구요. 제가 옛날에 실상사 사태가 났을 때, 해인사 선방스님들이 실상사에 가서 막 그랬을 때,  제가 신문에 글을 한번 쓴 적도 있었는데, 그 때 가서 뵙고도 정말 포용성이 대단한 분이시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겠는가, 이런 것으로 도법스님께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의를 해주셨는데요. 미학적으로는 상당히 부족한 면이 있지만 대충...
그리고 오늘은 또 사실 스승의 날입니다. 뭐 선생은 많이 있을 수 있지만, 정말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 마음속에 기리고 있는 스승님이 계시는 분 있으시다면 손을 한 번 들어보시죠. 전혀 없군요... 몇 명 계시는군요.
제 경우도 그렇습니다. 저는 밖에서는 스승을 못 만났던 것 같아요. 근데 출가를 하고 절집에 와서 몇 분의 스승님들을 만났습니다. 도법스님도 그 중에 한 분이시구요. 그래서 스승의 날을 맞아서 과연 스승이 부재한 이 시대에 도법스님에게 기억되는 스승은 과연 누가 있는지, 한번 여쭤보도록 하죠.
 
도법 : 뭐 그야말로 스승 아닌 사람이 없죠, 정확하게 보면.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는 돌아가신 진월스님에 대한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잘 모르시죠? 아주 키가 나보다도 더 작습니다, 그분은. 그리고 뭐 전혀 학력 같은 것도 없는 분이고요. 지식이 많은 분도 아니고. 늘 누더기 걸치고 지팡이 하나 짚고 그렇게 살아가신 분이었는데. 그이가 아는 것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위세가 등등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사실은 그분이 갖고 있는 객관적인 면모는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대하는 진정성, 이 부분이 참 지극하세요. 누구를 상대하든지 참 지극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늘 저는 그 분이 그리운 분이다, 스승을 얘기하자면. 제가 직접 만났던 스승으로서는 가장 제 마음에 남아있는 그런 분인 셈이죠.
근데 제가 경험적으로는 스승은 잘 가르치는 사람이 스승이 아니고, 정말로 배움의 자세로 끊임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의 면모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요, 저 자신도 그렇게 해 보려고 마음을 쓰고 그렇습니다.
 
성전 : 정말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어요. 하루하루를 정말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진정한 스승이다, 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 우리가 귀담아 들어볼 대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그렇잖아요. 어느 경지에 오르고 좀 익숙해지면, 출가자들도 그렇죠 사실은, 출가의 날들이 반복되다보면 언제 출가했나, 이거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하지만 늘 새롭게 깨어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배워가자는 마음으로 산다면 삶을 날마다 새로운 날로 만날 수 있고 늘 깨어있는 의식 속에서 시간들을 만나고 또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더욱더 발전이 있지 않을까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스님은 간디도 또 그렇게 생각하시잖아요. 아니신가요?
 
도법 : 역사적인 인물은 그렇죠. 간디를 통해서 저는 불교를 배우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불교인들이 많이 와계신다는 전제를 좀 하고, 저는 간디를 통해서 부처님도 훨씬 더 잘 알았다는 생각이 들고, 간디를 통해서 불교 사상을 삶으로 실천해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데도 많이 배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간디에 대해서 아주 놀랍게 바라보는 부분이 핵심적으로 두 가집니다. 하나는 그이는 국가나 민족보다도 더 우선하는 가치를 늘 붙잡고 추구해갔던 분입니다. 혹시 여기에 국가와 민족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가 뭘까, 혹시 있으세요? 간디는 국가와 민족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를 진리라고 얘기했습니다. 진리. 그래서 당신의 삶을 진리파지(眞理把持. 진리를 손에 잡고 놓지 않는다) 운동이라고 얘기했죠. 그래서 그분은 목숨을 걸고 이 진리, 진실, 참된 것을 찾고 참된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서 살아갔던 인물입니다.
인도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대단히 무력적으로, 또는 공격적으로, 파괴적으로 독립운동이 벌어집니다. 국민들이 엄청 거세게 분출했기 때문에 인도 정부도, 영국정부도 거의 통제 불능 상황이 왔습니다. 네루같은 정치인들은 그냥 이대로 상황이 진행되면 독립이다,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왔는데, 간디는 이건 안 된다고 얘기합니다. 왜. 진리에 어긋나는 독립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진리의 정신에 맞는 독립이어야만 이것이 희망적인 독립이 되지, 진리의 정신에 어긋나는 독립은 아무리 독립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이건 희망적일 수 없다, 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거에요. 국민들이 엄청 분출했기 때문에. 영국도 어찌할 수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간디가 그렇게 얘기하죠. 이건 진리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을 해도 결국 비극은 반복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간디가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합니다. 나는 진리의 길을 버리고 독립을 추구하려는 것을 내 살아생전에 볼 수가 없다.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는 간디의 마음을 읽어낸 인도의 민중들, 그래서 그 소란이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독립은 지연되지만 진리의 방식으로 인도 독립을 실현해 가는 과정을 관철시켜가죠. 이런 걸 보면, 이게 사람인가 싶어요 사실. 너무 놀랍죠, 그렇죠? 당장 독립인데, 그냥 가면. 그것이 추진하는 과정이 진리에 합당 하냐, 안 하냐를 가지고 독립을 포기한다는 것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간디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은 부처님 삶 속에서도 확인되어지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에서 얘기하고 있는 대승보살을 우리와 가까운 역사 속에서 찾는다면 간디를 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저는 간디에 대한 관심을 참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간디를 통해서 부처님을 배우고 간디를 통해서 불교를 배우고 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성전 : 역시 간디를 좋아하고 존경하세요. 간디는 이런 말도 했죠. 인생은 진리의 실험 도량이다, 라는 얘기를 했는데, 진리가 아니면 그 무엇도 우선할 수 없다는 간디의 정신, 우리 불자들에게 꼭 필요한 정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스님 출가하신지가 한 40여년 되셨죠?
 
도법 : 예, 40년 좀 넘었죠.
 
성전 : 스님 출가하실 때 승단과 지금의 승단, 많은 차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내용이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도법 : 글쎄요. 그 때 당시는 어리고 그래서 사실은 불교 상황이 어땠는지 잘 모르고, 또 사회적으로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잘 모르죠. 그 때는 신문을 볼 수도 없고, 방송을 들을 수도 없고, 그냥 초발심자경문이나 붙잡고 절집 안에서 맴맴 돌고 살아야 되는 이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사실 잘 모르죠.
그런데 절집에서 10년, 20년 살면서 보니까, 약간 그 때부터 보이기도 하고 또 3,40년 지나면서 또 변화되는 면모들을 보게 되는데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이나 이런 것들은 굉장히 많이 커졌습니다, 그 때에 비해서. 아마 제가 본 바로는 94년 종단개혁을 하고 한 5,6년, 아마 내가 한 40년 동안 봐 온 불교 종단으로서는 이 때가 가장 사회적 위상이 가장 높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비록 사회적 위상은 낮고 또 내부적으로도 굉장히 혼란스럽기도 하고 굉장히 낙후되어있기도 했죠. 그렇긴 하지만 지금과 다른 것이 있다면, 쉽게 얘기하면, 그때는 주지를 서로 잘 안하려고 했습니다. 한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지를 잘 안하려고 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주지하기위해서 그야말로 목을 매지 않습니까. 아마 과거의 종단과 오늘의 종단의 차이를 보면 이런 것들이 극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나 불교 대중들이 굉장히 뭔가 주체적이고, 또 자립적으로 우리 불교 문제를 다뤄가려고 하는 그런 의식들은 굉장히 많이 향상되었죠. 그래서 지금 불교는 사실 굉장히 좋은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문명사적으로도 그렇고요, 한국 지식인들의 경향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기회가, 이 중요하고 좋은 기회가, 불교인들이 정말 좋은 기회로 제대로 소화시켜낼지는 사실은 대단히 의문스러운 것이 현실이고, 이 부분이 정말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전 : 그 변화를 정말 좋게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법 : 일단 불교를 제대로 알아야 된다고 봐요. 한국 불교의 문제의 원인은, 한국 불교의 구성원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달리 얘기하면 불교를 하면서도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이 확립되어있지 않다,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니까 종단을 운영하거나 우리가 활동하는 것들이 거기에 맞는 방법론으로 접근해가지 않게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불교를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가장 비불교적인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불교를 다뤄버리고, 불교를 한다고 하면서도 그야말로 중생의 속성인 철저하게 자기중심의 이기적 관점, 또는 종단 중심의 집단 이기심의 관점에서 문제를 다뤄버리는 그런 결과들이 나타나고, 그런 것들이 우리를 계속 자기모순에 빠져버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죠.
불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올바른 이해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해야 하는 것,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들어있는 사상과 정신들을 내 것으로 가꿔내는 것, 이런 것들이 근간이 되어야만 우리가 하는 것이 올바른 불교활동이 되어지는데, 이런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 너무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성전 : 사실 아마 이런 문제에는 다 공감을 할 겁니다. 불교적인 세계관, 철학, 운영방식, 이런 것들이 너무 막연하게 다가온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근데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채 우리가 신행생활을 하거나 승단의 일원으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해소가 될지, 한번쯤 또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근데 스님은 또 상당히 많은 승가에 몸담으시면서 출가 이후에, 상당히 주체적으로 많은 변화를 추구하면서 죽 살아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우도량 결사도 그렇고요, 여타의 종단 사태 때도 항상,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원하든 원치 않든 중심에 서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애로사항들이 있었을텐데, 스님이 생각했던 변화의 방향이라든지, 변화의 크기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지금 종단적으로 제대로 반영되고, 이루어지고 있는지 한번 말씀해보시죠.
 
도법 : 요즘 종단은 잘 모르겠어요. 전 요즘 그냥 떠돌이 삶을 한 5년 하다보니까, 종단 상황을 사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현상들을 보면 대단히 참 위험한 처지에 와있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물론 종단을 운영해가다보면 잘못할 수도 있고, 또 전혀 엉뚱한 길로 갈 수도 있죠, 일을 하다보면. 근데 문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데도 불구하고 누구 한사람 그것을 정확하게 비판하고 바로잡기 위한 노력들이 나오고 있지 않다는 거죠. 그래서, 총무원장 스님은 발언을 잘못했다, 어떤 행동을 잘못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저항하거나 바로잡기 위한 노력들이 안 나오고 있다는 것이 우리 종단의 위기현상이라고 전 보고 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달리 얘기하면, 불교는 대화의 종교인데 우리 종단이 언로가 살아있지 않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충분하게,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될 수 있고, 이런 것들이 충분하게 종합되어서 뭔가 문제가 정리되어져 가야되는데, 이 대화가 막혀있다, 언로가 죽어있다, 이것이 결국은 불교를 최악의 상황으로 가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조선일보에서 본 칼럼이 기억나는데요,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 여성 특파원이 쓴 칼럼이었어요. 소위 현대문명 사회가 굉장히 위험한 상황으로 가다보니까 세계 정상들이 모여서 현대 문명사회가 어떤 성격으로,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끝에 정리한 개념이 ‘지속가능 발전사회’라는 개념입니다. 그냥 변화와 발전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담보로 한 발전을 모색해야만 된다는 얘기죠. 그래서 지속가능 발전사회로서 모델로 주목되어지는 조그만 도시 이야깁니다.
스위스인가 스웨덴에 있는 도신데요, 주로 우리가 지속가능 발전사회를 이야기하면 환경문제를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그 시장(市長)을 취재해서 쓴 칼럼이죠. 어떻게 해서 이런 지속가능 발전사회, 이명박 정부가 표현하는 방식대로 하면 소위 선진문명사회의 모델로 주목받는 도시를 만들 수 있었는가, 그러기 위해서 환경정책을 어떻게 펼쳤는가, 이런 질문들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시장의 대답이 지속가능 발전사회, 소위 선진문명사회를 만들어가고 그런 모델로 주목받는 도시가 된 것은 환경정책 하나 잘 펴서 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죠. 그럼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느냐니까, 결국은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에 지속가능 발전사회의 대안적 모델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 얘기죠. 그 말은 달리 표현하면, 언로가 살아있는 사회, 이런 얘기가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대화의 종교이면서도 자유로운 대화를 할 수 없는 오늘의 우리 절집 풍토, 오늘의 우리 종단 풍토는 바로 불교를 최악의 상황으로 가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렇게 보고 있죠.
 
성전 :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언로를 차단하는 가장 주된 요인이 뭐라고 스님께서는 보고 계십니까.
 
도법 : 첫째는 우리가 불교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두 번째는 불교적 가치의식에 대한 신념들이 너무 약하다, 그리고 다음은 구조적인 문제라든가, 그런 풍토적인 문제라든가, 관행적인 문제들이 있고 그렇죠.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죠.
 
성전 : 제가 인드라망생명공동체에서 넘겨받은 질문지 가운데, 아주, 뭐라 그럴까, 재밌는 질문이 있더라구요. ‘삶의 끝자락은?’ 스님 삶을 회향한다면, 어떠한 모습으로 삶을 회향하고 싶으신지, 아마 이런 질문을 하고싶은 것 같습니다.
 
도법 : 글쎄요. 난 내일에 대한 구상과 계획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죠. 난 늘 오늘을 살려고 노력을 할 뿐이지, 내일에 대한 구상과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인드라망 일도 그런 구상과 계획을 갖고 해온 게 아니고, 그 때 그때 무엇이 진짜인가, 무엇이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무엇이 정말로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인가, 늘 이걸 찾아서 가는 방식이에요. 그런 방식이기 때문에, 죽을 때 어떻게 죽을래, 인생 마무리를 어떻게 할래, 이런 구상과 전망은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성전 : 인드라망생명공동체에서 질문을 잘못 뽑았죠, 그죠? 중도적인 삶을 사시는 스님에게 내일의 죽음을 말한다는 것은 좀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들여다보면 틀린거구요. 제가 전에 한번, 종합검진 한번 씩 안 받으세요 했더니, 안 받는다 그러더라구요. 오늘을 사는데, 내일을 살 것도 아닌데, 왜 받느냐고 그 때도 그러시더라구요.
그리고 재밌는 게 또 하나 있는데요, 누가 이렇게 아주 익살스러운지, 좋아하는 노래 한 소절만 불러주세요. 스님 아마 음치 같아요.
 
도법 : 저는 사실은 약간 좀 의식딱딱한(?) 편인데요, 좀 무식하게, 단도직입적으로, 그래서 뭐 별로 어디가서 겁먹고 그러지 않는 편인데, 노래하고 춤추는 데는 좀 기가 죽습니다.
 
성전 : 호랑이 곶감 무서워하듯이 또 스님도 노래는...
 
도법 : 그건 왜 그러냐하면 우리가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게, 중은 노래를 해서도 안 되고 노래를 들어서도 안 되고, 춤을 춰서도 안 되고 춤추는 것을 봐서도 안 되고, 이런 게 아주 뇌에 꽉 박혀있죠.
 
성전 : 그러니까 너무 경직되어 있는 거에요, 사실
 
도법 : 그러다보니까, 그런 것들을 가급적이면 피하고, 거부하고, 이렇게 살아온 셈이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나치게 사람들이 그런 부분에 있어서 좀, 우리가 술자리에 가보면 술을 안 먹고 싶거나 그만 먹고 싶은데, 안 먹거나 그만 먹을 수 없는 분위기로 막 몰고 가잖습니까, 한국인들이. 하여간 이런 것들, 노래같은 것들도 그런 것들이 좀 있어서 일부러 제가, 이건 좀 적절치 않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편입니다.
 
성전 : 그런데 말이죠, 제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요, 저는 목요일 아침마다 라이브로 노래를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다시듣기 클릭 수를 조사해보면 목요일 날이 제일 많아요. 사람들이 전화를 해요, 격려성 전화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현대는 이렇게 포교를 해야겠다면서, 아주 굉장해요^^
 
도법 : 성전스님 노래 한번 듣죠
성전 : 그건 아니구요. 근데 어쨌든 대중들은 스님들이 좀 더 뭐라 그럴까, 부드러워지고, 또 좀 더 모던해지고,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사실 ‘스님’하면 너무 정형화되어있고, 멀다고 느꼈었는데, 그런 정형화된 틀을 깨고 스님이 노래를 부르고 이러니까, 오히려 반응이 좋긴 하던데, 그것이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전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전에 제가 도법스님과 이야기하면서, 요즘 스님들이 많이 기능주의로 전락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이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스님께서는 보고 계시는지요.
 
도법 : 초기 불교에서는 사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노래하거나 듣거나, 춤추거나 가서 구경하거나 하지마라고 되어있는데요, 대승불교에 오게 되면 이런 것들이 많이 바뀌죠. 그래서 훨씬 다양한 문화 활동, 예술 활동들이 종교적 의미로, 어쩌면 불상, 불화도 다 그런 유형의 하나인 셈이죠.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은, 비록 그것이 노래를 하든, 춤을 추든, 그림을 그리든, 글씨를 쓰든, 놓쳐선 안 될 부분은, 그런 활동들이 불교 세계관과 철학, 불교 사상과 정신에 토대한 활동들이어야만 되는데, 후대로 오면 올수록 뭐랄까, 그런 사상과 정신이라는 측면들은 계속 약해지거나 또는 간과되고, 굉장히 기능적으로만 발달해가는 경향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사회가 다양해졌고 사회적 요구도 다양하기 때문에 불교도 그 다양한 요구에 응답할 필요는 있겠는데, 그 응답을 할 때 불교 사상과 정신에 토대해서 춤으로 응답을 하든지, 노래로 응답을 하든지, 그림으로 응답을 하든지, 이렇게 가는 고민들이 있어야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성전 : 그러면 불교적인 문화 컨텐츠를 개발해야 된다는 얘긴지, 아니면 그런 사상들이 승려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는 얘긴지.
 
도법 : 최근에 노래하는 스님, 몇 분 계시잖아요,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려보죠. 어떤 스님이 노래를 하길래, 스님이 노래를 하려면, 스님이니까, 문제의식을 그냥 일반 노래꾼들과는 좀 달리 가지고 하면 좋지 않겠느냐,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 대안으로 얘기되는게 생명평화 운동인데, 스님은 생명평화라는 주제를 좀 진지하게 천착해서 노래를 하는 스님으로 활동하면 좋겠다,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또 어디선가 어떤 스님은 그런 쪽의 문제의식을 갖고 노래하는 스님이 있더라구요.
똑같이 노래하는 스님인데 그런 자기 세계관이나 철학을 갖고 노래하는 것하고, 그것 없이 그냥 노래 부르는 것하고는 많이 다르다고 봅니다. 그래서 똑같이 노래하는 스님이지만 내가 그분들을 대할 때 느낌은 많이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면 그런 사례들을 얘기할 수 있지 않겠나...
 
성전 : 마지막으로, 스님께서 쭉 생명평화 도보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대운하 반대도 하고 계신데, 지금 정부나 국민들을 향해서 한 말씀 하시죠.
 
도법 : 정부를 상대해서 하는 얘기는 하도 많이 하니까, 제가 굳이 안 해도 괜찮을 것 같구요. 다만 이런 건 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운하 문제를 가지고 아주 단순하게 얘기를 한번 해보죠.
운하를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왜 운하를 추진하려고 하냐 하면, 좋은 나라 만들고 나라 잘되게 하려고, 라고 합니다. 그렇잖습니까? 왜 그래야되는데, 하고 물으면, 결국 내가, 우리 식구들이, 또 우리 국민들이 다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한테 왜 반대하는데 하면, 똑같은 대답이 나옵니다. 그렇죠? 반대하는 것도 나라 잘되게, 좋은 나라 되게, 우리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목적이 똑같애요.
목적은 똑같은데 우리는 찬반을 갖고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럴까, 하고 짚어보면, 결국 거기에는 가치의식의 차이입니다.
운하를 추진한다는 사람들은 더 많이 갖고, 더 편리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그렇게 살면 행복해진다, 이런 가치의식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죠. 더 많이, 더 편리하게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운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뭘까. 자연과 함께, 이웃과 함께, 어버이와 함께, 평화롭게 인간답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고, 이렇게 가야만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게 가치의 차이거든요. 그러면 이 가치의식을 두 가지로 놓고 볼 적에 어떤 것이 진리에 합당한가, 어떤 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맞는가를 갖고 우리는 얘기를 해야됩니다. 평가를 하고 우리의 태도를 취하기도 해야되는 거죠.
그렇게 접근을 해보면 당연히 운하는 바람직하지 않다, 또 꼭 해야된다면 정말로 투명하게, 국민적으로 충분하게 지혜를 모아서, 정말로 잘 판단하고 대책을 세워서 가야한다는 쪽이 훨씬 진리에 합당하고 부처님 가르침에도 맞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거죠. 그래서 운하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좁게는, 불교인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갖고 우리 문제를 어떻게 다뤄갈 것인가를 깊이 천착해서 그 길을 제대로 가면 해답이 제대로 나올 수 있는 문제이고, 폭넓게는 국민들이 역시 잘못된 가치의식을 버리고 진리에 합당한 가치의식으로 삶의 문제를 다뤄가게 되면 운하 문제는 저절로 정리되는 거죠.
그래서 다행히 정부도 국민을 하늘처럼 모시고 가겠다고 했으니까, 국민의 그런 걱정과 문제 제기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고, 국민의 요구가 어떤 형태로든 거기에 합당한 응답이 될 수 있도록 가야, 그것이 우리 국민을 위한 정부라고 할 수 있죠. 그렇잖아요. 나라의 주인이 국민인데, 국민의 뜻을 외면하고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간다고 하면 그건 우리 정부라 할 수 없죠. 그런 면에서 당연히 정부가 더 겸손해져야 되고, 더 열려져야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반면 그런 것들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불교인들이 불교를 제대로 하는 데에서 그 길이 확실하게 만들어져가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성전 : 저는 오늘 도법스님 말씀을 들으면서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보고 반성해보게 됐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다 그렇죠. 그냥 현상을 현상적으로 보고 현상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현상을 다만 현상으로 보고 현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거기엔 정말 답이 없습니다. 계속 분쟁과 분열, 파열음이 끊이지 않게 되어있죠. 하지만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현상이 아닌 의미와 어떤 본질, 이런 것들을 찾아간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반드시 길이 있을 것 같고, 서로 함께 어울려서 상생하고 화합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믿음을 갖기도 했습니다.
오늘 도법스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봤는데요, 도법스님은 역시, 뭐 복색은 저렇게 허름해도 역시 우리시대의 아름다운 스승의 한 분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좋은 말씀 해주신 도법스님께 큰 박수~
 
도법 : 복색이 이만하면 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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