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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 10주년 두번째 정기법회 - 생명평화와 한반도 운하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22:58 63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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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말씀드릴 주제는 ‘생명평화의 눈으로 본 한반도 운하’ 문제입니다. 운하문제는 끝났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런데 사실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면 역설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굉장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무난하게 잘 갔으면 우리 스스로가 무지하거나 혹은 무시하거나 또는 간과하거나 했을 문제들을 다시 꼼꼼히 챙겨서 생각하도록 이명박 대통령이 만들었습니다. 아마 그러한 역할은 어떤 종교계나 정치세력 혹은 시민운동 세력이 나서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과 사고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정치적으로 ‘정권교체’, ‘잃어버린 10년’ 이렇게들 말하는데 즉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국민정부와 참여정부)에서 현 정부로 정권교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세월동안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삶의 문제 또는 사회문제를 면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100일 사이에 해낸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굉장한 의미를 갖는 겁니다. 국민들이 삶을 생각하는 문제의식이라든가 정부나 정치, 그리고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의 수준이 이번 기회를 통해 대단하게 성숙되었다고 봅니다. 이것은 그냥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을 또는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타오른 촛불현상을 보면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저는 ‘생명평화’라고 하는 가치척도를 갖고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새삼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말만 되면 산으로 들로 갈려고 하죠? 형편만 되면, 기회만 주어지면 산으로 들로 갈려고 합니다. 왜 그런다고 생각하세요? 이 현상을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시가 갑갑하니까. 또 직장생활 하고, 이런 저런 살림살이 하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그래서 갑갑증을 풀기위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등산의 이름으로, 관광의 이름으로, 답사 등등의 이름으로 기회만 주어지면 산으로 들로 갑니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게 보는 것이 틀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자연스런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현상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순하게 갑갑증을 풀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기분전환을 위해서 하는 행동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사회/도시문명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어쨌든 자연 속의 여러 존재 중 하나인데 도시문명사회라고 하는 것은 일단 자연과 아주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고 자연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번에 강 순례를 하면서 그 전에 차타고 왔다 갔다 할 때는 그냥 시끄럽다고만 생각 했는데,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보니까 서울에는 자연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이라고 하면 푸른 나무가 있고, 강물이 흘러가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그러면 자연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자연이 없다고 하는가 하면 첫째는 서울에는 어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거죠. 밤과 낮으로 밤 절반, 낮 절반 이렇게 돌아가는데 괜히 만들어 진 것이 아니죠. 이 세상이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기 위해서, 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생명들이 안전하게,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질서입니다. 그런데 서울에는 생명이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 중에 절반이 없는 겁니다. 밝음만 있고 어두움은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에는 자연이 없다는 걸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어디에서도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기계소리 뿐입니다.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건 결국 자연이 없다는 겁니다. 또 시끄러운 소리만 있지, 고요한 소리가 없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자연이 없습니다. 온통 콘크리트뿐입니다. 사방을 봐도 콘크리트뿐이고, 귀청을 울리도록 들리는 소리는 기계소리 뿐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니까 뿌연 먼지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 도시문명사회라고 하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단절된, 자연으로부터 멀리 결별한 그런 곳입니다.
 
사실 인간은 자연의 존재로 자연에 의지해서 태어나고, 자연에 의지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데 자연과 단절하게 되면, 자연과 관계가 끊기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삶이 가능할까요? 삶 자체가 불가능해지죠. 우리가 기회만 닿으면 산으로 들로 찾아가는 이유는 단순하게 갑갑증을 풀기 위해서 또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와 같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성적으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훨씬 더 심층적으로는 생명의 위기의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러다가는 내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연과 결별할 수밖에 없겠구나, 관계가 단절될 수밖에 없겠구나, 그렇게 되면 내 생명이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명의 위기의식들이 바로 그런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최근의 촛불현상으로 나타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촛불집회가 처음에는 중․고생들에 의해서 타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부모님들에 의해서 타올랐다고 하는데, 왜 중․고생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촛불을 들고 나오게 되었을까.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너무 경쟁력만 강조하다 보니까 중고생들이 자살하기도 하고, 온갖 심리적․정신적 질환 때문에 시달려 왔습니다. 물론 광우병 (미국산)쇠고기 수입이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경쟁만을 강조하는 이러한 생명위기의 현상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성과 부작용에 대해서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쇠고기가 수입이 되면 특히 학생들은 학교 급식을 통해서 끼니를 해결하는데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광우병 쇠고기가 수입이 되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먹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내 생명이 병들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의 위기로 내몰릴 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것도 두려울 수 없습니다. 어떤 계산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살길을 찾게 되는 겁니다. 다만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절박하지 않았던 겁니다. 다른 계산들이 복잡하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살길을 찾아서, 또는 살아남기 위해서 절규하고, 몸부림 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지상정이고, 바로 촛불로 타오르게 된 이유입니다.
저는 이번 현상을 보면서 생명의 가치에 눈을 떴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당히 많은 자기모순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내 생명의 가치, 혹은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생명이 스스로 이렇게 가다가는 어찌될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부분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하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삶의 문화를 가꾸어내는 일들을 구축해내지 않으면 이런 일이 언제 어디서 다시 발생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제 운하문제를 제대로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엔 별로 얘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들 사고의 호흡이 길고, 깊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또 즉자적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극복하고 넘어서야할 과제입니다.
 
제가 100일간 운하를 주제로 그 배경인 강을 순례했는데, 순례를 하면서 정말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우리가 정직하지도 성실하지도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평소 강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말인즉 강이 중요하다고 얘기는 하지만 과연 평소에 내가 강의 문제를 정말로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성의 있게 대하고 다루었는가 하면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은 멋지게 하고 있는데, 삶을 멋지게 살고 있지는 않구나. 이런 내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을 멋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멋지게 사는 것이겠죠. 삶은 추하게 살면서 말만 고상하게 하면 그건 사기이고, 자기기만이며, 나아가서는 세상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을 순례하면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말 대단하구나, 자연 자체가 위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도 정말 위대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그동안은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이번에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느끼고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운하문제를 가지고 강을 순례한다 하더라도 ‘운하를 반대하자’ 이렇게는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운하를 한다고 하니까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어떤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까 그런 길을 찾기 위해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요컨대 그동안 내 스스로가 잘못 보고, 잘못 생각하고, 그리고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삶은 그럴듯하게 살지 아니한 자기모순, 자기결함, 자기오류 이런 것들을 면밀하게 성찰해서 이제부터라도 말이 아니라 삶을 멋지게 사는 그런 종교인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 그런 마음에서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순례를 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 그 위대함에 대해서 몸으로 깊이 체감해 ‘운하는 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운하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하는데 하나는 시대정신입니다. 21세기 시대정신은 무엇입니까? 현 정부가 계속 내세우는 것은 ‘선진사회’, ‘실용정부’ 인데 그렇다면 과연 선진일류사회라는 것이 내용적으로 무엇인지를 보면 현 정부는 경제논리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운하를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일자리 창출하고, 경제를 3만불, 4만불로 끌어올리고 이런 것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 정부가 안목과 철학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현재의 사회를 너무 모르고, 7~80년대의 한국사회를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소위 말하는 선진 강대국들 혹은 선진 일류사회,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 도시사회 또는 과학문명사회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현대문명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선진국들이 주도해서 만들어낸 개념이 있는데 ‘지속가능발전사회’라는 것입니다. 이를 단순화시켜보면 20세기는 개발과 성장을 통해 사회발전을 추구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는 기존의 방식으로 사회발전을 추구할 경우, 그리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인류의 재앙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문명사회를 주도해왔던 강대국들이 나서서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만들어낸 개념이 지속가능발전사회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진일류사회로 가기 위해서 첫째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우리 생명의 절대조건인 건강한 자연생태의 건재함입니다. 자연/생태적 조건들이 건강하게 살아있지 않고서는 문명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겁니다. 선진 강대국들에 의해 선진 일류사회의 또 다른 이름으로 제시된 지속가능발전사회 개념인데, 이것이 바로 21세기 시대정신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현 정부가 이런 시대정신을 읽는 그런 안목과 철학이 있었다면 문명의 절대적 조건, 우리 생명의 일차적 조건, 그리고 지속가능발전사회로 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근본인 한반도 자연/생태의 가치를 근간에 두고 모든 국정문제를 다루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이러한 21세기 시대정신에 대해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가 부족하고, 안목도 철학도 없습니다. 그렇다보니까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하면, 또는 경제수치를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면 우리 문명의 절대조건인 한반도 자연/생태가 어떻게 되는가는 크게 구애받지 않고 쉬운 길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운하문제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본인들이 얘기하는 선진사회로 정말 가고자 한다면 제대로 내용을 충실하게 담아서 명실상부한 선진일류사회가 되도록 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수식어로만 생각하고 쉬운 길로 가려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운하가 바로 시대의 흐름을 얼마나 가볍게, 또 경박하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돈을 벌고, 자동차를 사고, 큰 집을 마련하고, 멋진 옷을 입고 등등의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인가하고 목적을 따져보면 물론 여러 가지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돈을 벌어서 멋지게, 폼 나게, 품위 있게, 아름답게 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강을 순례하면서 보니까 오염된 곳들도 있지만 천혜의 자연이 살아있는 곳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들을 가면 저절로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짐을 느낍니다. 우리에게 편안함과 따뜻함, 여유로움, 그리고 넉넉함과 환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강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우리의 미적감성들이 왜곡되고,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와 의식, 느낌들이 너무나 속물스러워지고, 천박해졌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예술품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신하거나 넘어설 수 없습니다. 아울러 어떤 예술품도 자연이 제공하는 여유로움과 넉넉함, 따뜻함과 건강함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의 존재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하고, 오히려 인위적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들에 빠져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들만 보고, 느끼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먹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데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인위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의미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인간이 아름다워질 수 있으며, 따듯해 질 수 있고, 여유로워 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살고 싶은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이 살고 싶은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서 운하는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참된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불교적 의미의 나의 본래의 면목, 청정 본연한 나의 본래의 면목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운하를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오늘 생명평화의 눈으로 한반도 운하를 바라보는 것에 대해 얘기했는데 정리하면 시대정신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러니까 한반도 문명을 위기로 몰아가는 정말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운하는 해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내가 혹은 나의 자녀가 살고 싶은 아름다움을 위해서 어떤 예술품보다도 더 귀중한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희생시키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왜곡된 아름다움을 누리려고 하는 삶의 방식이 계속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두 가지를 주요하게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운하문제는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 스스로가 참된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청정본연의 감성들을 회복해내고 그것을 생활화시켜내는 이런 노력들이 더 줄기차게 열성적으로 일상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지만 운하와 같은 일들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서 오늘 얘기를 하였습니다.
 
제 얘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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