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망 10주년 8월 정기법회 - 인드라망 사회상 > 도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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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 10주년 8월 정기법회 - 인드라망 사회상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23:00 65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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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시원해졌죠. 인드라망이 만들어진 지 10년이 되었고, 10년을 기리기 위해서 그러니까 10년을 정리하기도 하고, 또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 이 10주년 법회입니다. 그동안 ‘생명평화의 눈으로 본 대운하’, ‘생명평화의 눈으로 본 한국사회’ 등 현실적인 주제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생명평화 세계관 또는 불교적 의미의 인드라망 세계관’에 대해 지난 법회에서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인드라망 사회상’, 인드라망의 눈으로 본 사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불교는 사실 어렵게도 얘기하고, 복잡하게도 얘기하고 있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요새 말로 표현해서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의 가르침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불교는 다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일인지 검증, 증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을 보면 바로 과학이지 않습니까?
 
제가 다녀보니까 ‘함께 하자’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더불어 하나 되자’, ‘우리 함께 하자’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보니까 어디에도 실지로 함께 하는 길은 없었습니다. 말 뿐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어디에서도 함께 하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보면 불교적으로 하면 기독교인들과 함께 할 수 있나요? 기독교적으로 하면 역시 불교인들이 함께 할 수 없고, 진보적으로 하면 보수가 함께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의 관점에서 얘기하면 자본가가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관점에서 얘기하면 남자가 동의하지 않고, 아무리 뒤적거려 보아도 함께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대학에서 배운 얘기를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공평하고, 불교적으로 얘기하면 기독교인에게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공평한 길도 나올 수 없고, 함께 하는 길도 나올 수 없습니다. 이는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2,600년 전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래서 계속 편 갈라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원효가 화쟁론을 쓴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온통 싸움밖에 없으니까 이 싸움을 정리하고 수습해보고자 했던 것이 바로 화쟁론입니다. 그러니까 이천년 전 인도에서 부처님이 고민했던 것이나 천 몇백년 전 신라땅에서 원효가 고민했던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말은 공평하게 하자, 함께 하자 하면서도 그건 말일 뿐, 현실적으로 공평하게, 함께하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갈등과 싸움, 분열과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뭔가 어떤 형태로든 공평하게 함께하는 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럴 때 부처님은 여실지견(如實知見),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 생각대로 보지 말고 있는 사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생각대로 봅니다. 우리 생각으로 보니까 태어나는 것은 좋은 것이고, 죽는 것은 나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론 태어남과 죽음은 내용적으로 아무 다를 게 없습니다.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구체적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내 관념대로 태어남과 죽음을 보니까 태어남은 좋은 것, 죽음은 슬픈 것 이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실과는 관계없이.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마치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는 것처럼.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붉은 안경을 쓰면 모든 사물이 붉게 보입니다. 검은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검게, 실제 색깔과는 관계없이. 이렇게 하는 한 함께 하는 길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내 생각으로 보고 다루는 한은 절대 함께 하는 길이 나올 수 없습니다. 또 공평하게 갈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의 말이라도 그냥 믿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경전에 나온 얘기거나,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의 얘기거나, 혹은 부처의 얘기라 할지라도 그 말을 구체적 현실로 갖고 와서 사실과 진실로 맞는지 충분히 검토하고 따져서 사실로 이해되고 수긍되면 그 때 받아들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전혀 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사실 불교는 앎의 종교입니다.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그 앎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도둑놈인지 아닌지 확실히 모른다고 할 때 그 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불신이 생기겠죠. 그리고 늘 불안하겠죠. 그런데 확실히 알게 되면 어떨까요? 도둑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믿을 수 있고, 그 관계를 편안하게 할 수 있겠죠. 반대로 도둑놈이라고 확실히 알게 되면 그에 대한 대비를 잘 하게 되겠죠.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건 앎이라는 겁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 그리고 그 내용에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그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초기 불교에서는 중도(中道), 팔정도(八正道)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팔정도 내용이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라. 그리고 그것에 맞게 생각해라, 말해라, 행동해라, 그것에 맞게 노력해라, 그것에 맞게 늘 깨어있어라. 그것에 맞게 늘 평정을 유지해라. 이런 것입니다. 팔정도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여실지견, 여실지견행입니다.
 
인드라망세계관은 인간은 태어나고 태어나지 않음의 여부에 관계없이 좁게는 지구라고 하는 자연생태, 크게는 범우주라고 하는 존재의 법칙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지구라는 자연생태가 먼저 존재했는데, 거기에는 국경이 있었습니까? 당연히 없었죠.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자연생태 이것이 근본이죠.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습니까?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물의 그물코처럼 이루어져 있다. 모두가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이 말이죠. 이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냐 하면 목 마를 때 물을 마셔야 한다. 그러면 목마름이 해소된다. 이것이 기독교적 논리인가요?, 불교적인 논리인가요?, 아님 진보적인 논리인가요?, 보수적인 논리인가요? 누가 부정할 수 있습니까? 왜 그러냐면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구나가 동의한다면 그건 함께 하는 것이겠죠. 또 누구나가 동의한다면 공평한 거겠죠. 불교는 이런 것입니다. 불교는 아주 단순명쾌한 것입니다. 왜냐 있는 사실을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있지 아니한 걸 얘기하면 아주 복잡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법칙이고, 질서입니다. 
 
지난 법회에서 세계관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계관은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방향과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방향을 잡고, 그 방향을 향해 나있는 길을 걸어가는 것 이것이 방법론과 기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방향과 길의 문제는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고, 걸어가는 기술과 방법만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향을 모른 채 기술만 가지고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을 원효는 ‘모래를 쪄서 밥을 하는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개입하기 이전, 그러니까 부처가 세상에 나오고 나오지 않음에 관계없이, 석가모니가 깨닫고 깨닫지 못함에 관계없이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연기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불교 세계관은 연기론적 세계관이라고 설명하고, 이 연기론적 세계관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 ‘인드라망’이란 개념입니다.
 
세계관이 본질이라고 한다면 사회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개입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미국이니, 한국이니, 일본이니, 이라크니, 기독교니, 불교니 하는 것들은 모두 인간이 뛰어들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개입해서 만들어 낸 것은 당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이 다르고, 한국이 다르고, 기독교가 다르고, 불교가 다르고 그렇습니다. 나무로 얘기하면 뿌리가 근본이고, 미국이니, 한국이니, 진보니, 보수니,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것들은 나무 가지와 잎사귀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나무 가지와 잎사귀들은 다 다르지만 그 중심을 내려가 보면 한 뿌리 한 기둥입니다. 인간이 개입하기 이전에는 불교나 기독교나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나 보수나 다를 수가 없습니다. 범위를 한반도로 좁히면 한반도라고 하는 자연생태 조건에 토대해서만 불교, 기독교, 진보, 보수니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지구라는 자연생태 조건은 우리 모두가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 모두에게 공평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 세상은 대동소이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동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은 차이만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럼 사회상이 어떻게 이루어졌나? 제가 생명평화경이란 경전을 만들었는데 사회상이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자연은 뭇 생명의 의지처이고, 뭇 생명은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공동체 존재이니라. 이웃 나라는 우리나라의 의지처이고,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국가 공동체이니라. 이웃 종교는 우리 종교의 의지처이고, 우리 종교는 이웃종교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종교 공동체이니라. 이웃 마을은 우리 마을의 의지처이고, 우리마을은 이웃 마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고향 공동체니라. 이웃 가족은 우리 가족의 의지처이고, 우리 가족은 이웃 가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이니라. 그대는 내 생명의 어버이시고, 나는 그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공동체 생명이니라."
한마디로 공동체란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루어진 자연세계도 공동체 세계이고, 인간이 만들어 낸 것도 마찬가지란 얘기입니다. 언뜻 보면 분리될 것 같지만, 분리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관념이고 착각일 뿐입니다. 전도몽상일 뿐입니다. 실지는 모두 관계입니다. 마음에 들든, 마음에 들지 않든. 자연법칙과 자연질서가 모두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 맺어서 존재하듯이 인간이 만들어 낸 것도 서로 의지하거나 서로 관계 맺어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도 공동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사회엔 관계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온통 관계뿐입니다. 관계를 떠나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연질서도 관계로 이루어져있고, 인간이 만들어낸 것도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은 함께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나라는 그물코가 있고, 너라는 그물코가 있습니다. 이게 분리되어 있습니까?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까? 분리된 그물코는 없습니다. 따로 이면서 함께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자타불일불이(自他不一不二)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있는 사실을 언어로 표현하는 한 가장 충실하게 표현한 개념입니다. 그물코와 같은 논리입니다. 나라고 하는 그물코와 너라고 하는 그물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물코는 이렇게 따로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로 있기 때문에 불일(不一), 하나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동시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이(不二), 둘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둘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이런 겁니다. 이걸 뒤집으면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 이런 얘깁니다. 자연을 보더라도 자타불일불이 관계로 이루어져있고,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를 보더라도 불일불이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모기는 나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태학이 발달하면서 전문가들은 지구상에서 모기가 사라지면 인간은 불치병을 앓게 된다고 말합니다. 모기가 사람을 물고, 질병을 옮기는 것 같지만 굉장한 내성을 길러준다고 합니다. 내성을 길러 주기 때문에 인간이 불치병을 앓는 재앙까지는 가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모기가 쓸모 있습니까?, 쓸모없습니까? 쓸모 있죠. 우리는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확인해 보니까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모기가 없으면 큰일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기와 나는 현상으로 보면 남남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단절되면 안 되게 되어있습니다. 결국 모기와 나는 자타불일불이, 하나로 획일화 되어 있지도 않고 완전히 분리되어서 남남으로 되어 있지도 않은 불일불이의 관계라는 겁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공동체적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나누면서 살도록 되어 있는 게  생명의 법칙이고 생명의 질서라는 겁니다. 또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법칙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법칙도 그러해야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또 진속불일불이(眞俗不一不二)이렇게 표현합니다. 물론 이 말은 여러 각도에서 적용될 수 있는데, 굳이 쉽게 얘기하면 眞은 자연상태를 얘기한다면 俗이라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 불일불이 이듯이 인간이 만들어 낸 것도 불일불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또한 불일불이입니다. 아울러 불일불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온통 그물의 그물코처럼, 자연이란 그물코 인간이란 그물코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표현합니다. 내용으로 보면 공존, 조화, 균형 이런 것들입니다. 자연과 인간도 공존과 조화, 균형을 이루어야 되고, 이 나라와 저 나라, 또는 이 종교와 저 종교, 또는 진보와 보수, 자본가와 노동자,  또는 도시와 농촌, 남성과 여성 등 인간들도 공존과 균형, 조화로 삶을 살아야 그게 잘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평화롭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있죠. 이는 법, 존재의 법칙을 모르고, 모르니까 무시하고, 무시하니까 법의 질서가 다 무너지는 겁니다. 그렇다보니까 결국 이기는 놈, 일등만 산다 이런 식으로 되는 겁니다. 일등논리를 정당하다고 믿고, 경쟁력 논리를 진리처럼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자, 평화롭게 살자 하면 그 말이 맞습니까? 그건 말장난입니다. 불교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말합니다. 경쟁력 논리와 일등이 제일 이라는 사고방식과 신념을 갖고는 절대 함께 사는 것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평화로워질 수 없습니다. 말뿐 사실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깨고자 했던 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생각만 있을 뿐 현실로는 없는 것을 모두 깨 야 하는데, 이것을 앞서 말한 중도라고 합니다.
 
현실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데,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처럼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것이 부자와 일등이라는 개념입니다. 부자는 현실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사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 만약에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부자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면 그건 파멸의 길입니다. 만약 60억 인구가 미국사람들처럼 먹고 쓰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인류문명은 그 즉시 끝납니다. 자연생태적으로, 자원적으로, 에너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부자논리라고 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아무 대책도 없는 논리입니다. 부자가 무슨 말입니까? 부자라는 것은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근데 왜 미국이 전쟁합니까?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나라가. 더 부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미국도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 않는 겁니다. 부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말만 있는 겁니다. 그렇게 부자라는 것은 전체적으로, 내용적으로 보면 아무 대책 없는 얘깁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누구는 부자이고, 누구는 가난하다고 하면 인간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불공평하잖아요.
     
불교에서는 이런 환상, 착각, 허망한 꿈들을 한 마디로 전도몽상이라고 하고, 전도몽상을 버리면 바로 열반이라고 합니다. 열반이라고 별 것 아닙니다. 부자는 없는 거야, 이루어질 수 없는 거야, 부자는 우리 모두가 망하는 길이야, 이렇게 사실적으로 알고 이해하면 바로 그 순간 부자 때문에 기죽을 일 없고, 부자 못 된다고 안달할 일 없습니다. 그게 바로 열반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우주적 존재법칙이 온통 관계로 존재하도록 되어있고, 그 법칙에 의해서 이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 이것이 인드라망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사회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 하든, 마음에 들든 마음에 들지 않든, 알든 알지 못하든 관계없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것들도 인드라망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내용으로 보면 그물의 그물코처럼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협력하고, 골고루 나누면서 살도록 되어있는 게 존재의 법칙이다. 그걸 공동체적 삶이다 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사회상 이야기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처럼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들도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상으로 제 얘기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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