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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며

인드라망사무처
2022-11-13 21:58 71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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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부처님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간의 원초적 화두에 대해 한마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습니다. 그 한마디 외침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천하가 슬픔에 잠겨 있는 상황인데 무슨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그 뜻을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 우주의 존재법칙인 보편적 진리에 의해 태어난 생명의 존재인 그대와 나는 천하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진리의 존재임을 뜻합니다. 둘째, 천하의 그 누구 그 무엇도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없으므로 죽으나 사나 자신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매우 주체적인 진리의 존재임을 뜻합니다. 셋째, 인드라망 즉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그물에 그물코처럼 서로 의지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서로에게 너무나 귀하고 고마운 이웃이요, 동반자임을 뜻합니다. 

오늘 당신의 죽음 앞에서 거룩한 한마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외침을 듣습니다. 유아독존답게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지극하게 모시고 섬기며 살아야 함을 온몸을 던져 보여주었음을 실감합니다. 지금 당신의 죽음 앞에서 당신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오열하고, 냉철하게 현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허탈해하고, 당신을 싫어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너나없이 서로 다른 입장들을 접고 당신의 죽음 앞에서 겸손하고 엄숙하게 추모의 예를 다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좋은 일입니다. 진작 우리 모두가 오늘처럼 마음 쓰고 살았다면 애당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만날 소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추모사를 쓰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납승은 당신의 죽음을 추모할 마음도 여력도 없습니다. 당신을 죽게 하고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가 여전한 현실을 어찌할 수 없으니 숨이 막힙니다. 슬픔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대중들을 바라보면서도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한 종교인의 무능력과 게으름이 한심스럽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비극과 고통과 불행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바로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자신의 가슴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과 나라는 인간 존재가 좌익, 우익, 친북, 친미 따위보다 더 근본적인 가치이고 더 귀중한 존재임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어도 극단적인 좌우대립 동족상잔 남북분단의 비극이 벌어졌겠습니까? 그래도 오늘의 비극과 고통이 일어나겠습니까?

“삶과 죽음이란 자연의 한 조각이니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 어리석음으로 인한 일이니 연민스러워 할지언정 원망하지 말라.” 당신이 온몸을 던져 웅변하신 이 한마디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중생이 죽어야 그들의 꿈인 부처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죽었으니 수준 높은 한국사회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분명 국가, 종교, 좌익, 우익, 진보, 보수, 여당, 야당, 자본가, 노동자, 전라도, 경상도 따위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가치가 생명이요 인간이요 그대요 나임을 알리는 쇠북소리가 청와대에서부터 울려 퍼질 것입니다. <조선> <동아> <중앙> <한국방송> <문화방송> 등 언론들도 앞다투어 공명할 것입니다. 좌파도 우파도, 진보도 보수도, 여당도 야당도, 노동자도 자본가도, 이 종교도 저 종교도, 전라도도 경상도도, 반북도 친북도 모두 나서서 공명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유아독존이므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고마워하는 한바탕 춤바다가 펼쳐질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랬으면 좋겠지요? 당신의 뜻을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읽었다고 여기시면 편안히 잠드십시오. 혹 잘못 읽었다고 여기시면 벌떡 일어나서 ‘야! 중놈아! 너 같은 놈 때문에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야’ 하고 호통을 치십시오. 부디 남은자들을 믿고 편안히 잘 가십시오.


한겨레신문 2009.5.27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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