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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삶·수행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1 04:01 69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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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삶·수행

 
오늘은 우리가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오늘 떠오르는 해가 한해를 시작하는 새로운 해라고 생각하지만, 어제와 같은 해입니다. 한해의 시작은 인간이 만들어낸 약속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약속 또는 합의와 관계없이 매일같이 뜨는 해와 지는 달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모습에서 보듯이 우리는 관념으로 만들어진 것에 의해 사고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본래 취지를 잃어버리면 엉뚱한 것에 매달려 삶을 살기 마련입니다.
 
일과 수행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삶은 이런 거야.”, “일은 이런 거야.”, “수행은 이런 거야.” 라고 우리는 합의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합의된 것들이 본래의 취지에 맞게 일상 속에서 잘되고 있는가 보면 일, 노동, 삶, 수행은 취지와는 관계없이 망각되기도 합니다. 최근에 조계사에서 한상균 위원장과 함께하는 20여 일 동안 노동의 문제를 직접 고민했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노동이란 말을 액면 그대로 풀면 ‘애쓰며 고통스럽게 움직이는 것’으로 일반대중의 인식에서는 ‘고통스러운 것’, ‘천한 것’, 이런 의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귀하고, 노동하는 사람은 천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념적, 정서적으로 자본가는 귀한 사람, 노동자는 천한 사람으로 나누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가 적대적이고 굴복과 타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로만 표현되던 노동의 의미를 곰곰이 살펴보면 “삶을 창조하기 위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희망을 창조하기 위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애써 일하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이렇게 노동의 의미를 살펴보면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 없어요. 자본가도, 대통령도 모두 노동자이고 생명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한 모두 노동자입니다. 본래 취지와 달리 지금은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문제를 다루니, 노동은 자본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이런 문제를 통념화, 관성화된 사고로 다루면 안 될 것입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념적, 일반적으로 절하고, 기도하고, 참선하고, 명상 같은 활동을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노동이 본래의 가치와 취지를 잃어 삶을 왜곡하고 소모하듯이, 수행 역시도 격식화, 형식화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통념화 되어있는 것에 맞추면 수행은 삶과 같이 갈 수 없고 따로 가야 합니다. 법당은 삶의 현장이 아니지 않습니까? 선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법당이 노동의 현장이 아니고, 선방도 노동의 현장이 아닙니다. 이미 통념화, 격식화, 형상화된 기성의 틀에서 ‘수행과 노동’, ‘수행과 삶’은 현장이 다른 것입니다. 기성의 틀이 수행의 전부라 생각하면 안 되고, 본래 취지에 맞게 노동과 수행, 삶과 수행이 함께 가는 것이 진짜입니다. 필요에 따라 법당에 가고 선방에도 가면 됩니다. 우리는 삶과 충돌되고 괴리되는 수행을 하므로 실제 삶을 향상시키는 것은 결여되어있습니다. 10년, 20년 수행을 해도 삶이 구태의연하기도 합니다. 삶의 가치를 창조하고, 희망을 창조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땀 흘리는 것이 노동이라면 그 자체가 거룩한 것입니다. 이처럼 노동을 하는 삶은 거룩한 삶이고, 이런 거룩한 행위를 하는 삶이 수행이 아니라면 무엇이 수행일까요?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수행이고,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 진짜 수행입니다.
 
 
*2016 활동가 동안거, 대표스님 법문을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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