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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 눈부처를 봅시다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23:08 61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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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 눈부처를 봅시다
이도흠(한양대 국문과 교수)

 
하버마스(J. Harbermas)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적자인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는 이성이 도구화하여 오히려 개인의 생활세계와 무의식의 영역까지 억압하고 국가와 자본이 연합하여 착취와 소외를 심화하는 20세기 현대성의 위기를 성찰한다. 동시에 그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달리 이성이 가지고 있는 계몽적이고 비판적인 힘과 유토피아를 향한 주체의 실천을 중요시한다. 때문에 그는 인간의 연대를 깨고 소외를 심화한 ‘목적적 합리성’을 지양하고 개인이 합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이 세계를 인식하면서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서로의 자유와 연대, 주체성을 증진시키는 ‘소통적 합리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가 수년 전 한국에 왔다. 그로부터 뭔가 배우려는 우리의 초청에 의한 것이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들이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의 태도를 취하여 우리 학문의 식민성을 그대로 보여주었지만, 정작 그는 거꾸로 한국으로부터 자신의 학문을 한 단계 높일 지혜를 얻고자 왔다고 하였다. 그는 유교와 불교, 기독교와 가톨릭, 샤머니즘 등 다종교사회인 한국이 종교간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지 않고 공존하는 지혜를 터득하길 바랬다.
 
그럴 정도로 우리는 종교 갈등으로 수백 년 동안 내전과 전세계 차원의 전쟁을 거듭하고 있는 서양과 달리, 이웃종교 사이에 화해하고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는 사회문화적 바탕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이것이 깨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층은 거의 광기 수준의 집착과 편견을 가지고 이웃 종교를 비방하고 물리적 폭력까지 서슴지 않았다. 원인은 도저히 지도자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 수장으로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이웃종교를 철저히 배제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권력의 정점에서 서로 연대하며 강한 권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세 명의 신학자 가운데 하나인 본 회퍼 신부는 나치즘에 맞서서 저항하며 “미친 자가 차를 운전하여 사람을 해치고 있다면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차에서 끌어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의 말처럼 광기에 대해서는 강력한 주체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 더불어 필요한 것은 동일성의 사유를 지양하는 것이다.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태아를 불 속에 던져버리던 난징 대학살 때의 일본 군인의 모습만 보면 이들은 악마의 화신이다. 하지만, 그들도 첫사랑에 온밤을 설렘으로 지새우고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에 눈물을 훔치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저들은 우리 편이 아니야. 저들이 사라져야 우리가 잘 살 수 있어.”라는 식의 배제 담론과 이로 형성된 이데올로기가 그들을 그렇게 악마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20세기가 전쟁과 학살의 시대가 된 근저엔 동일성의 패러다임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사유는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이에 대하여 들뢰즈(G. Deleuze)는 동일성으로 귀환하지 않는 차이(difference)의 사유를, 레비나스(E. Levinas)는 타자성(alterity)의 철학을 대안으로 내세우며, 이는 원효(元曉)의 변동어이(辨同於異)론과 유사한데 이것을 쉽게 설명하는 것이 눈부처의 차이다.
 
두 사람이 서로 똑바로 마주 보면 상대방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보인다. 이를 순수한 우리말로 ‘눈부처’라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형상도 그렇지만, 타자를 사랑하고 섬기며 타자와 무언가 나누려는 마음이 부처의 형상으로 맺혀져 타자와 나의 경계가 무너진 단계다.
 
내가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를 타자로 설정하고 차별하는 것이 동일성의 사유와 실천이라면, 그들을 한국 불교도와 똑같이 존엄한 존재로 포용하고 똘레랑스로 대하는 것은 차이의 사유와 실천이다. 하지만 이것이 눈부처의 차이, 혹은 차이 그 자체는 아니다. 그들에게서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죽은 내 삼촌을 발견할 때, 나에게서 일하다 손가락을 잘리고 다리가 절단되자 불법체류 외국인으로 신고하여 한 푼도 보상하지 않고 추방한 한국의 악덕 기업주의 모습을 확인할 때 그 차이에 이르는 것이다.
 
이처럼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 타자 안의 나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를 통해 나를 완성하려는 것이 눈부처의 차이다. ‘눈부처의 차이’의 사유로 바라보면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무너지며 그 사이에 내재하는 권력,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은 서서히 힘을 상실한다.
 
21세기인 오늘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통해 동일성을 강화하는 20세기의 유산에서 완전히 벗어나 서로 눈부처를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독교도들은 자신에게서 불교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성경의 진리와 불교의 진리가 둘이 아님을 깨달아 볼 수 없을까? 불교도들도 기독교나 가톨릭 신도에 비하여 민주화 운동이나 가난한 이웃에 대한 봉사와 희생의 영역에서 과연 무엇을 행하였는지, 이번 사태로 승려들과 재가불자들이 거리로 나섰을 때 비불교도 대중들이 외면한 이유는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면 안 될까?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타자와 내가 깊은 연관관계 속에 있음을 깨닫고 타자를 보듬고 그를 자신의 몸과 마음에 품는 길이 바로 자신이 완성되는 길이다. 그처럼 진정으로 타자를 사랑하는 이는 그에게서 부처의 모습을 발견하며, 그 순간 그도 부처가 된다.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에게서 지금 눈부처를 봅니다.”라고 인사한다면 세상은 좀 더 맑아지지 않을까?
 
이제 우리 서로 눈부처를 보면서 살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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