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이별의 수행 > 마을공동체

본문 바로가기

인드라망 아카이브

만남과 이별의 수행

인드라망사무처
2022-11-13 22:49 678 0

본문

만남과 이별의 수행

김용우(원주 한알학교 대표, 인드라망 전문위원)


  

내가 몸담고 있는 한알학교는 남한강변의 작은 마을에 있다. 요즘 남한강변은 온통 초록빛이 짙어 가고 있다. 감자파종이 끝난 우리 마을은 지금은 한미한 농촌이지만 옛날엔 작은 나루터가 있어 충청도와 경기도로 가는 사람들이 북적대던 곳이다.


며칠 전 시내에서 우리 마을로 들어오며 강을 바라보니 문득 옛날 고등학교 때 배운 시 한편이 생각났다. 고려 때 정지상이 쓴 송인(送人)이라는 시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雨歇長堤草色多(비 개인 강둑엔 초록빛 짙어가는데)

送君南浦動悲歌(님 보내는 남포에서 이별노래를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물은 언제 마르리)

別淚年年添綠波(해마다 이별눈물 초록물결에 보태는 것을)

 

아마도 시절은 이즈음 봄풀이 막 짙어가는 때고 장소는 대동강변 남포이다. 이별하는 사람은 시인과 시인의 절친한 벗이나 님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우리는 멀리 있는 친인척을 비롯한 지인과 벗을 쉽게 만날 수 없었다. 대부분의 교통수단이 걷는 것 외에는 없었고 조금 편하고 빠른 것이 말이었다.

 

또한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철따라 일이 많았고 겨울철에는 쉬이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람 생각하는 정만은 각별했고 벗을 사귀고 헤어짐이나 정인을 사귀고 헤어짐은 각별했다. 멀리 있는 벗(님)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고 헤어질 때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 어려운 이별이었다. 나루터는 이별의 장소다. 이제 배를 타면 언제 만날지 모르는데 술 한잔과 노래가 빠질 수 없고, 보내는 사람의 눈에는 이별의 눈물이 체면도 없이 자꾸 흐른다. 시는 그 장면에 그냥 멈추어 서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초고속 교통수단과 통신망으로 인해 지구 어디에 있든 통화를 하고 아무리 멀어도 만나고자 하면 이삼일이면 만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현대인들의 삶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의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만나는 것도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쉽게 헤어진다.

 

깊이 있는 만남과 대화, 정 나눔도 없고 헤어질 때 악다구니나 안 쓰면 다행이다. 우리가 이번 생에서 만나는 인연은 수천억겁의 인과 연으로 만난 것인데 그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서로의 덕을 쌓는 만남으로 대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만남이 그러하니 헤어짐도 서로의 안녕과 지복을 기원하는 헤어짐을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한 생애를 소중히 돌아보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고 만남과 헤어짐의 매순간을 충일한 자리로 만드는 것이 수행이다. 만남에 집착할 필요도 없지만 모든 만남을 자비로 만나는 것은 수행자의 도리다. 모든 경전의 가르침은 그리하여 이제 이 세상에서 평생 만나고 보내는 입장에서 수행하다가 종국에 떠나는 주인공이 되었을 때 살포시 웃으며 한 생애를 감사하며 떠날 수 있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 살기 위해서는 삼라만상의 도움과 헌신 속에 살고 또 돌아가는 것이다. 한시도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몸이다. 그리하여 한 생명은 다른 생명의 삶에 또 영향을 준다. 알면 아름답고 모르면 슬프다. 그러니 늘 삶속에서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하라고 해월 최시형 선생도 말씀했다. 모든 만남과 헤어짐을 공경하고 겸허하게 모시라는 말씀이다. 마주하고 있는 이 봄 만남과 헤어짐을 얼마나 자비롭게 그리고 존귀하게 행하고 있나 돌아보게 된다.


인생 자체가 현생과의 큰 만남과 헤어짐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는가? 티벳 경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올 때 나는 우는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네. 나 이 세상 떠날 때 나는 웃는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우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적용하기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