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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날의 기억

인드라망사무처
2022-11-13 23:26 66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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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날의 기억


 

복숭아 익는 달콤한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여름날. 그날 아침 산책길은 며칠 가지 못했던 배 밭이 있는 농로(農路)쪽 길로 접어들었다. 산마을 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올라가다 보면 논 가운데 제법 넓은 배 밭이 있고 배 밭을 지나고 나면 논둑에 꿀풀들이 무리지어 보랏빛 꽃을 피우고 개울가 얕은 산비알에는 물봉선화 군락이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배 밭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새들의 푸드득 대는 날개소리가 부산하게 들렸다. 이상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였다. 귀를 세우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보니 그것은 배 밭 뒤의 복숭아밭에서 나는 소리였다. 스무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있는 작은 밭인데 그 한 귀퉁이에서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방이 철망으로 둘러쳐진 좁은 울타리 속에 뜻밖에도 까치 열댓 마리가 갇혀 있었다. 까치들은 좁은 공간을 날아오르며 쉴 새 없이 날개를 퍼덕여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려쬐는 뜨거운 햇빛에 날아오르다가 지치면 잠시 머리 위 철망을 물고 숨을 헉헉대다가 또다시 이리저리 날아오르기를 반복한다. 그 푸드득 대는 날개소리는 소리 없는 비명처럼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한 옆에 찌그러진 냄비에 꿀꿀이 죽 같은 시큼한 냄새가 나는 질척한 밥그릇이 놓여있고 물그릇도 있다. 밖에서 여닫을 수 있게 철사로 고리를 만든 문짝이 제법 공력을 들인 듯했다. 작심하고 까치들을 사육할 준비를 한 게 분명했다. 복숭아를 쪼아 먹는 까치들을 톡톡히 벌주고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함일 게다. 그러고 보니 앞의 넓은 배 밭은 그 전체를 그물로 완전히 덮은 게 눈에 들어왔다. 야생동물들 때문에 농사짓기 힘들다는 농부들의 푸념이 들려오는 듯 했다. 오죽하면 이리 했을까 밭주인의 입장을 생각하면서도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

착찹한 마음으로 철망 옆을 떠나 몇 발자국을 떼어놓으려니까 갑자기 뒤에서 까치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다급한 구조요청이었다.

 

“살려주세요! 살려 주세요!”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처절한 울부짖음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성큼 되돌아가서 재빨리 철망의 고리를 풀었다. 까치들은 창공에 힘차게 포물선을 그리며 건너편 숲속으로 날아갔다. 나는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밭 임자가 달려와 드잡이를 할 것만 같아 가슴이 두 방망이질 쳤다. 만일 밭 임자를 만난다면 까치들이 쪼아 놓은 못쓰게 된 복숭아들을 내가 전부 사 주리라. 나는 미지(未知)의 밭 임자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어설픈 다짐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일주일 후 산책길에 다시 들른 그곳의 까치 사육철조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마치 내가 꿈을 꾼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해 봄 그곳은 복숭아나무들이 전부 사라지고 다복솔을 촘촘하게 심어 논 푸른 소나무 밭으로 변했다.

 

오늘 달콤한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면서 이 복숭아를 길러낸 얼굴 모르는 농부의 수고와 땀을 생각하며 저 여름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하루 빨리 농부들이 마음 편히 농사를 지으며 노력에 걸 맞는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기 위하여 바람직한 도농공동체의 적극적인 모색과 생활협동조합의 활성화가 필요한 게 아닐까.

 


임완숙_시인.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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