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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16호] 귀농자 탐방 - 삶의 본질을 찾고자 산에 들어왔어요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7 23:51 72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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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을 찾고자 산에 들어왔어요

- 권남혁, 이명순 산골부부의 보금자리 방림재 탐방기

박도 (작가)



소리와 빛은 외물이다

겨울철 산골에 사는 사람이 뭐 그리 바쁘냐고 그럴 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늘 바쁘고 밀린 일감이 많다. 그런데도 내 귀가 엷은 탓으로 바깥에서 오는 부름이나 다른 이의 청을 거절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혈육이나 친지의 부름으로, 또는 내 스스로 그들이 그리워 오래 살았던 도시로 나가 그동안 이런저런 연(緣)으로 맺어온 사람들을 만나지만 돌아올 때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경우가 더 많다. 내가 도시를 떠나 이곳에 온 지가 3년밖에 되지 않지만,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이나 생각들이 그들과 너무 큰 차이가 있음을 번번이 확인하기 때문이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耳目)에 누(累)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라고, 연임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말한 바 있다. 아직 산골 생활도 수양도 부족한 사람으로서 도시사람들의 일상 말들에도 마음이 아프거나 흔들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내가 건네준 전화를 받으니 인드라망의 소식지 취재 부탁이라, 앞뒤 생각 없이 쉽게 수락을 하고는 곧 후회를 했다. 그 하나는 요즘 내가 새 일을 막 시작하려는 참이요,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사는 곳은 전기도 전화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깊은 산골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곳보다 훨씬 더 외진 산중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별 생각 없이 던지는 질문으로, 혹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흔들어놓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 아닌가.


곧 추위도 닥치고 많은 눈이 온다는 일기 예보를 듣고는 서둘러 탐방 길에 나섰다. 출발에 앞서 미리 손 전화로 방문 의사를 밝히고 사는 곳을 물으니, 지명이 귀에 익은 곳으로 이전에 두어 번 지나쳤던 곳이었다. 서둘러 점심을 먹은 뒤 아내 차를 타고 42번 국도로 달렸다. 문재터널을 지나자 마침내 평창군 팻말이 나왔다. 국도 언저리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뇌운계곡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차창으로 비친 계곡 경치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핸들을 잡은 아내와 나는 꽃피는 봄이나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 다시 한 번 들러보기로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는, 그곳을 지나치자 곧 방림 삼거리가 나왔다. 오른쪽으로 가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대화요, 왼쪽은 평창이었다.


우리 내외는 거기서 평창 가는 길로 꺾어 5분쯤 더 달리고서는 길가에 다수 원당 계곡이란 안내 팻말에서 다시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맑은 시내를 건넌 뒤 임하감리 교회에서 다시 손전화로 위치를 두어 번 더 물은 뒤에야 그들 가족이 살고 있는 방림재(芳林齋)를 찾을 수 있었다.


백덕산 줄기의 하나인 두리봉 기슭에 있는 방림재로 가는 길은 여태 일부는 포장이 안 돼 있었다. 포장길까지는 승용차로 갔으나, 더 이상 차로 오르기에는 무척 험한 길이라 거기서부터 걸어 올랐다.


어딘가 꺼벙해 보이는 방림재 주인 권남혁(39)씨가 좀은 겸연쩍게 우리를 맞았다. 영악해 보이고 깎은 듯 세련된 그라면 어찌 이 산중 처사가 되었으랴. 그는 거실로 안내하려 했지만 우리는 먼저 집 구경 겸 사진촬영부터 먼저 했다.


방림재는 아래 위 두 채 모두 통나무로 지은 흙집이었다. 아래채는 그들 가족이 사는 공간이었고, 위채는 ‘나그네를 위한 공간(민박용)’으로 보였다. 그는 이날 저녁 귀농자 모임을 이곳에서 한다고 하면서 아궁이에 군불을 때던 중이었다.


올 가을 우리 집은 화목 아궁이를 연탄보일러로 바꿔버렸다. 아내와 나는 그새 화목아궁이에 향수에 젖은 듯, 활활 타오르는 장작을 뒤적이다가 주인이 안내하는 아래채 거실 차상에 앉았다. 방림재 주인이 손수 만들었다는 향기 그윽한 차를 마시면서 차담을 나누었다.



내가 살 곳은 이곳이다

방림재는 행정상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임하리 6번지였다. 바깥주인 권남혁씨와 안주인 이명순(39)씨,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권무열(13)과 유치원에 다니는 딸 권현빈(7) 등 네 식구가 오순도순 산다는데, 우리가 도착한 때는 바깥주인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왜 귀농했느냐는 우리 내외의 바보 같은 질문에 그는 멋쩍게 시익 웃고는 “귀농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찾는 귀본(歸本)이랄까, 삶의 뿌리를 찾는 귀근(歸根)했다”고 했다. 예사사람처럼 도시에서 대학(경영학과)을 졸업, 옷감을 수출하는 회사에 다니면서 결혼을 한 뒤 아이를 낳는 그저 그런 소시민으로 살았단다.


그 언제부터인가 도시 삶에 “이것이 아니다. 나는 잘 났는데…”라고 회의를 느끼면서 살아오던 중, 이 산골을 발견하고는 “내가 살 곳은 바로 이곳이다” 하고서는 그들 내외는 둘째인 갓난아이를 데리고 2001년 이곳에 내려왔다고 했다.


대체로 여성들이 더 도시 지향적인 데 쉽게 아내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집사람이 따라 준 게 행운”이라고 했다. 아내가 끝내 반대했다면 내려올 수 없었다고 단언했다.


그들 내외는 이곳에 내려온 뒤 이태 동안 손수 산비탈에 터를 닦고 흙집을 지었는데 아직도 방림재는 미완성이라고 했다. 그동안 전기도 없이 살다가 꼭 필요할 때만 하루 두어 시간씩 발동기를 돌려 전기를 썼다는데 이태 전부터 평창군의 보조로 태양열 전기를 쓴다고 했다. 그런데 이 태양열 전기는 날씨에 따라 발전양이 들쭉날쭉하기에 밤에도 한 등만, 그것도 잠깐 동안만 쓸 수 있단다.


그런데 전기도 없는 비문명적인 생활일수록 그는 가족애가 더 깊었다고 했다. 저녁이면 불이 없거나, 하나의 등불을 쓰면서 아끼다가 보니, 네 식구가 한 곳에 모여 함께 놀이를 하거나 수수께끼나 끝말잇기 나라 이름대기 같은 놀이를 하였단다.


하지만 태양열 전기가 들어오고 인터넷이 연결되자 네 식구가 한데 모이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어서 무척 아쉽다는, 체험에서 우러나는 말을 했다. 문명화되고 도시적인 삶이 깊을수록, 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심지어는 조기 해외유학 등) 가족이 해체되는 오늘이 아닌가.


잠시 뒤 아들이 먼 산길을 걸어 학교에서 돌아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이곳으로 전학 왔다는데 서울이 그립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숙제가 없는 시골학교가 서울학교보다 더 좋다는 영판 산골소년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동네 친구도, 마땅한 놀이 감도 없기에, 집에서 책을 많이 읽은 탓으로 비록 학교공부는 뒤질지라도 역사 지리나 이런저런 상식 등 아는 게 무척 많다면서 은근히 아들자랑을 했다.


차담을 나누는 새 안주인이 유치원에서 딸아이를 데리고 왔다. 마당에 나가 가족촬영을 하고서 다시 찻상에 앉았다. 그에게 이따금 보따리를 싸본 일이 없느냐 나의 물음에, 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전혀 그런 적이 없었다고 했다. 지금은 방림제 안주인이지만 그는 대학원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석사 출신으로, 이곳에 오기 전에는 전공 계통의 식품개발연구소를 잘 다녔던 직장인이었다.


도시에 있는 친지들이 나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흔히 던지는 질문은 생활이 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런 물음을 내가 가장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 부부에게 친정 부모처럼 염려하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이런 산중에서 생활이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의 주 수입원은 산야초효소 판매와 부수입 민박으로, 여태 적자를 면치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적자를 면할 날이 올 거라고 하면서 염려치 말라는 듯 활짝 웃었다. 조금도 궁색한 티도, 찌든 티도 전혀 없는 밝은 웃음이라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하기는 그런 마음가짐이 없다면 어찌 이 산중에 살겠는가?


“서울에서 지낼 때는 두 사람이 봉급을 받아 돈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고 넉넉했는데도 늘 돈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서는 그때보다 가난하고 부족한데도 돈에 대한 고민 없이 살아지는 거예요. 아마 그새 돈 없이도 사는 산중생활에 익숙해졌나 봐요.”


다시 도시로 나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들 내외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아이들도 여기서 고등학교까지 보낸 뒤, 대학은 그들의 선택에 따라 그때 독립시킬 예정이라고 했다. 부부가 자주 토닥거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저희 부부는 동갑내기로 잘 놀아요.”라고 슬쩍 내 물음을 빗겨갔다.



마음이 부자인 부부

방림재 거실에서 내려다 본 경치가 아주 선경이었다. 아내는 이곳이 마치 산사(山寺) 같다고 그 경치에 감탄했다. 그렇게 보니 그들 가족들조차도 모두 절에 사는 사람 같았다. 하기는 그런 마음이 아니고서야 어찌 산사람이 되었으랴.


우리 내외만 선계에 머문 게 미안해서 아무나 방림재를 찾아와도 반겨 맞아주느냐고 물었다. “그럼요, 이곳에 머물다가 떨어트려놓고 간 손님의 숙박료가 저희들의 큰 수입원이에요.”


네 가족 기준으로 방 하나 쓰는데 5만원이라고 했다. 통나무 황토방에 화목 아궁이 온돌방으로 찜질을 겸해 조용히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굳이 취사준비를 하지 않고 와도 실비로 당신네들과 함께 무공해 채소와 산채로 끼니를 이을 수 있다고 했다.


올 봄에 일반전화가 들어왔고, 곧 일반 전기도 들어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문명생활을 누릴 테지만, 한편으로는 방림재의 그윽한 맛이 잃어지고 마음이 부자인 그들 가족들이 점차 가난해지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잔뜩 흐린 하늘이 마침내 앞 차창에 빗방울을 떨어뜨렸다. 곧 함박눈으로 변할 듯하다. 실비 속에 연무로 싸인 42번 국도를 타고 내 집 안흥으로 돌아왔다.


잠시 선계에서 머물다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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