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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보면서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1 04:05 59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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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보면서 



이백여 명의 사망자와 많은 수의 피해자를 양산한 옥시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된 글을 청탁받았을 때 마음속에서 잠시 주저함이 생겼던 것은 이번 참사 역시 현장 속 고통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싯달타가 지닌 문제의식의 출발은 생로병사로 나타나는 인간의 고통에 있었고, 결국 붓다로서 이고득락의 길을 찾아 제시해 주었다.


관련해서 잘 알려진 자식을 잃어 슬픔에 찬 여인의 일화가 있다.

『죽은 어린 자식을 살려달라고 울며 애원하는 여인에게 붓다는 “여인이여, 마을로 내려가 가족이 아무도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움큼만 얻어오면 살려 주겠소”라고 말했다. 여인은 기쁨에 차 서둘러 온 성안을 돌아다니며 구했으나 어느 집이든 반드시 누군가 죽은 사람이 있었다. 성안의 마지막 집에서도 빈손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붓다는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길 수도 없으며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이에 여인은 크게 깨달아 붓다에 귀의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선종에서 법을 구하러 온 혜가스님에 대한 달마대사의 안심법문과도 일맥상통한다. 구하는 마음의 헐떡임에 대하여 전자는 대상의 무상함을, 후자는 마음이라는 대상의 실체 없음을 알아차리게 한다. 참으로 옳은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런 올바른 불교적 가르침을 가습기 살균제 사태나 세월호 참사 내지 5.18 광주 항쟁 등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의 슬픔 앞에서 들이댈 때 ‘과연 제대로 수용될 것인가’라는 점에서 부지불식간에 작은 망설임이 든 셈이다.


비록 어느 유족이나 그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고, 언젠가는 유족들에게 사람은 다 죽는 존재이니 마음을 비우라고 혹은 죽은 이들에 대한 마음의 실체 없음을 강조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당장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위와 같이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면 전혀 상황에 맞지 않은 이야기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어린 자식에게 누구보다도 잘해주고 자신이 못 먹더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먹이려는 부모 마음에 치명적인 화학물질이 들어 있는 첨가제를 가습기에 더욱 넣어 결국 어린 자식을 고통 속에 죽도록 한 부모의 통한 앞에서 나는 저 옳은 가르침을 말할 수 없다. 옳지만 맞지 않는 이야기일 뿐이다.


대부분의 참사가 그러하듯이 이번 가습기 살균제 참사 역시 다양한 층위에서 바라볼 수 있으며, 희생자 가족들의 길고 힘든 싸움 끝에 이 참사는 이윤에 눈이 먼 기업과 무책임한 정부, 그리고 기업을 도와준 과학자에 의한 총체적 사안임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관심했던 언론이나 우리 모두 책임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책임을 밝히고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은 사회와 우리 모두의 몫이라 할 때 과연 불자들은 이번 사태에서 무엇을 봐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참사의 이면에 있는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이다.


기업의 탐욕이나 정부의 무책임, 그리고 연구자의 비도덕성은 이미 세간에서도 충분히 거론되었기에 굳이 되풀이할 것이 없다면,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이 가습기 첨가제를 사용하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 담긴 과도한 과학 문명에의 맹신과 더불어 지나친 인간 위주의 위생관이다.


과학이 계속 발전하고 있음만을 기억한다면 현재의 과학지식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 공감할 수 있다. 지금의 과학적 모습이 100년, 200년 후도 여전히 똑같을 것이라고 믿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열린 체계이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가 겪는 많은 신약이나 화학물질에 의한 부작용과 문제점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계가 있는 인간 감각기관의 경험으로 이뤄진 우리의 이성과 감성은 태생적으로 감각기관이 지닌 한계성을 지니게 된다. 이성과 감성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제한된 범위의 세상에 불과하다. 이성에 근간한 과학 지식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이다.


한편, 위생이란 점에서 세균이나 곰팡이를 모두 제거해야 할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나 동물을 외부 감염으로부터 보호하고, 개체 유지를 가능하게 해 주는 면역기능은 신경계처럼 외부 자극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물론 기억까지 한다. 사람도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듯이 면역계 역시 적절한 외부 자극이 필요하다. 면역학에서 말하는 ‘위생가설(hygiene hypothesis)'은 그러한 관점에서 비롯한다.


위생가설을 쉽게 말하면 너무 깨끗하면 오히려 건강한 면역기능 형성이 저해된다는 시각이고, 자가면역질환이나 알레르기 등과 같이 현대 면역학으로 풀기 어려운 분야에 나름대로 통찰을 주고 있고, 지나친 청결과 체내에 있는 ‘고정 자연살해 T세포(iNKT, invariant natural killer T cell)’라는 면역세포 수와의 상관성 등 그 기전도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태어난 무균돼지를 무균 상태로 유지시키면 수개월 내로 사망하는 것처럼 인간이나 동물은 주변 미생물의 도움 없이는 결코 생존할 수 없다. 식품위생에 있어서도 ‘위해요소 중점관리 기준(HACCP)’ 등이 등장해 생산-제조-유통의 전 과정에서 식품 위생의 위해요소를 제거하거나 안전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어찌 보면 자연 생태계와 분리된 인간만의 세상을 꿈꾸는 오만함일 수 있다.

건강함이란 자연과의 열린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먹거리를 포함한 환경을 조금은 더럽게 하고 이를 즐길 수 있도록 하자. 먹거리에 흙도 묻고 때로는 배앓이도 하는 생활이 필요하다.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생태계는 철저히 인드라망 구조이기에 나만 잘사는 방법은 없다.


이번 가습기 사태에 있어서 참사를 불러온 우리 안의 탐욕과 나태, 그리고 그에 더해서 우리가 지닌 과학 맹신과 인간 위주의 생활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또 이런 경험과 고통으로 인해 당장은 맞지 않는 붓다의 올바른 가르침이 결국 우리 모두에게 맞는 이야기가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잊지 않아야 한다.


지금 한국불교에서는 나 하나 깨닫는 것만이 최상인 듯 강조되지만, 그것은 개인구복의 미신과도 같다. 대승불교의 진수는 너와 나의 인드라망 구조 속의 실천행이니, 그것은 개인의 깨달음이건, 자식을 잃은 개인의 지극한 슬픔이건 그 지점을 넘어 자타불이와 동체대비 삶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렇게 될 때, 유족들에게도 존재의 무상함과 마음의 실체 없음이란 바른 가르침이 너무 맞는 이야기로 들리게 될 것이다.


세상 고통의 근간에는 무명이 있다. 무명은 붓다의 가르침을 옳지만 맞지 않은 이야기로 전락시킨다. 허나 삶의 고통에 대한 성찰은 붓다의 옳은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로 전환되게 한다. 이번 참사를 겪으며 비탄에 있을 많은 희생자 유족분들의 고통과 함께하면서, 동시에 불자로서 그 아픔을 넘어 우리의 생태적 삶과 대승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살피는 계기가 되기를 생각해 본다.


 

우희종_인드라망전문위원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 광우병이나 원자력 등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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