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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를 다시 본다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7 15:35 65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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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순례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며칠전 사회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생명평화를 이야기하며 생명위기, 삶의 황폐화를 낳게 한 현대문명의 자기모순을 극복하고 넘어서기 위한 근원적 성찰과 모색이 절실함을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오늘 우리들은 진리실현의 삶으로 인도 독립을 이끌어낸 ‘마하트마 간디’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본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누군가가 흥분한 어투로 ‘간디’보다 ‘체 게바라’의 혁명정신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반론하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왔다. 그 자리에서 설명했던 내용을 정리해볼까 한다.

- 사랑의 힘으로 진리실현 -
물론 ‘체 게바라’의 훌륭함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체 게바라’의 세계관과 방법으로는 살상과 파괴로 얼룩진 현대문명의 자기 모순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길이 나올 수 없다. 21세기 절체절명의 화두인 생명위기, 공동체 해체의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바람직한 해답의 길을 열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째서 그럴까? 위험하기는 하지만 ‘체 게바라’와 ‘간디’를 단순하게 상대비교해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체 게바라’는 인간불행이 불의 때문이라고 보았고, ‘간디’는 진리(생명의 실상)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보았다. ‘체 게바라’는 약자의 편에서 일했고, ‘간디’는 진리의 자리에 서서 일했다. ‘체 게바라’는 불의의 대상을 공격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고, ‘간디’는 무지와 탐욕의 병을 치유하여 변화하고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체 게바라’는 비밀계획과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고, ‘간디’는 투명하게 진리의 실천방법인 비폭력의 길을 걸었다. ‘체 게바라’는 승리와 성공을 위해 필요한 수단을 다 사용했지만 ‘간디’는 진리와 사랑의 힘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았다. ‘체 게바라’의 길은 분노와 증오와 원한을 끊임없이 재생산시켰지만 ‘간디’의 길에선 분노, 증오, 원한이 정화되어 갔다. ‘체 게바라’는 목적을 위해 분노, 증오, 음모, 술수가 정당화되었지만 ‘간디’는 그 어떤 명분의 분노, 증오, 술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긴긴 세월 변화와 발전을 추구해 왔지만 끝없는 살상과 파괴로 점철된 모순에 찬 현대문명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언제 어디에서나 평화와 공존을 외쳐 왔지만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편 갈라서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동안 우리가 걸어온 길은 진리(생명의 진실)를 보지 않고 오로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진보냐 보수냐, 동지냐 적이냐, 이 종교냐 저 종교냐의 이름으로 편 갈라서서 힘겨루기 하는 길이었다.
역사경험은 기존의 신념과 방법론으로 살아가는 한 생명위기, 공동체위기에 대한 근원적 처방과 참된 희망의 길은 불가능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역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세계관에 눈떠야 한다. 정신을 차려 생명의 진실, 삶의 진실을 보아야 한다. 국가와 민족, 진보와 보수, 승리와 성공 따위의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는 절대적 가치가 생명임을 뼛속 깊이 인식해야 한다.

- 오직 생명평화의 삶 일관 -
생명평화는 지금 여기 자신의 문제요, 우리들의 문제이다. 생명평화와 무관한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생명평화를 떠난 그 어떤 활동도 무의미하다. 생명의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그 어떤 안목도 삶의 방향, 역사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아낼 수 없다. 생명의 진실에 근거하지 않는 그 어떠한 노력도 문제를 악화시킬 따름이다. 생명의 길을 통하지 않는 그 어떤 변화와 발전도 우리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 진정 생명평화의 삶, 생명평화의 세상을 희망하는가? 지금 바로 생명평화의 길을 걷는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있지 않다. 굳이 역사의 사례를 든다면 온몸으로 생명평화의 길을 걸어간 ‘간디’가 있다. 목적도, 방법도, 시작도, 과정도 생명평화의 삶으로 일관한 ‘간디’가 있다. ‘간디’를 다시 보아야 한다.

05. 5. 5 경향신문, [생명 평화 이야기] 간디를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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