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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 불교는 현대문명에 어떻게 대안일 수 있는가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7 15:43 46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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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위에 세워진 욕망의 탑


독일의 거지성자로 알려진 페터 노이야르 님이 지난해 11월 30일 실상사를 방문해 도법스님과 불교와 현대문명을 주제로 늦은 밤까지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페터님은 실상사에 머무르는 동안 대중방에 불을 뺄 정도로 독일에서의 생활을 이어갔다. 불교의 눈으로 현대문명을 통찰하고 그 대안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두 사람의 만남은 우리들에게 깊은 경책과 희망을 열어줄 것이다.

■일시 : 2543년 11월 30일 밤 9시~31일 새벽 1시
■장소 : 지리산 실상사 대중방
■대담 : 도법스님 vs 페터 노이야르
■통역 : 전재성 철학박사
■정리 : 수지행


 도법: <거지성자>를 읽고 사상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부처님 삶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 여기 실상사에서 <거지성자> 주인공인 페터선생을 만나게 되니 나로서는 대단히 기쁘다. 그리고 좋은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책에서 소개했던 것들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스승인 부처님은 스스로 거지의 길을 선택한, 최고의 거지인데, 그 거지 스승을 제대로 따르는 참제자의 모습을 대하고 보니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에 젖어 사는 자신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부처님을 따르겠다며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주어서 고맙다.

페터: 실상사가 한국의 구산선문 최초 가람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선불교의 전통을 살려낼 수 있는 도량이고, 현재에도 매우 의미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데 감명을 받았다.
실상사에서 직접 농사지은 무공해 야채를 먹었는데, 정말 신선하고 귀한 음식이었다. 오전에 실상사의 귀농전문학교를 둘러봤고, 실상사 농장공동체 구성원들과도 만났다. 교감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 위에서 자연친화적인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가르치고 실습하고 있는 것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현대문명사회는 온갖 비인간적인 행위와 공해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생태문화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생태농법이나 생태학교와 같은 활동들이 널리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그 활동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세기 문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도법: 부처님께서 이미 밝히셨듯이 중생적 삶의 방식은 모순과 고통을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무지, 즉 잘못된 인식의 토대 위에서 욕망의 논리로 삶의 문제를 다루어왔다. 그 결과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아온 게 그간의 역사였다.
흔히 20세기는 과학의 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비록 과학적으로 삶의 문제를 생각하고, 관찰하며, 다루어왔다고 하지만 그 결과로 나타난 우려스러운 현상들을 보면 역시 잘못된 세계관 위에서 문제를 다루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과거와는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들의 자만심이 엄청나게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만과 중생적 욕망이 결합 또는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20세기는 살상과 파괴의 역사로 점철되고 말았다. 20세기를 마감하는 현 시점에서는 오히려 더 큰 모순과 혼란, 또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결과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셈이다.

페터:  20세기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였다. 물질적인 산업화와 발전 속에서 과잉생산된 물질적 잉여는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키고 상품화함으로써 인간들의 참된 본성을 잃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새로운 모색으로 인간의 참자아를 향한 갈증이 증대되고 있기도 하다.
현대문명의 핵심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해 물질적인 생산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물질적인 만족을 중심에 세우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작은 기쁨, 큰 불행을 초래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아니고 나야말로 그것이 아니고,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즉 환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는 또 한편으로는 인간들이 인류의 문화를 개선해보겠다고 특별한 방식을 동원해 노력하기도 했던 시대이다. 그 과정에서 히틀러가 나타났고, 스탈린도 나타났다. 히틀러는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내세워 그들 중심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다.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명분으로 전체주의 국가를 세웠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종교 자체가 서구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종교이데올로기가 비어있는 틈을 타서 대체된 잘못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결국은 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엄청난 폐해만을 초래했다.현대문명의 문제는 중생이 갖고 있는 보편적 속성이, 고도화된 과학기술과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현실적으로 과학기술과 기계문명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눈과 기술과 조건들을 갖추게 된다면 과학기술과 기계의 고도화가 결코 폐해로 나타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삶의 상황은 물질적 발전이나 현대문명의 개선을 통해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개선해보려고 한 시도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개선하려고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역사가 되어 왔다. 앞서 도법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자만, 인간의 폭력과 잔인성을 전부 펼쳐 보여주기만 한 시대가 되고 만 것이다.
현재 우리는 1․2차 세계전쟁보다도 더 큰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것은 바로 환경을 파괴하는 전쟁이다. 인류는 과거 어느 역사를 둘러보아도 이처럼 심각하게 환경을 파괴한 적이 없다. 이 전쟁은 전면전이다. 즉 인류의 파멸을 촉진하는 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전쟁이다. 부처님은 모든 생물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종속물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부처님은 원래 편리한 타협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고, 단순성을 기본으로 하는 매우 고행자적인 길을 걸어가셨다. 타협적인 붓다의 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부처님은 ‘모든 감각적인 쾌락은 괴로움의 뿌리이다(Nandi dukkhasa m&#363;lam)’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20세기의 모든 경제와 문화의 추동력은 바로 이 감각적 쾌락이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발생한 20세기의 물질세계나 현대문명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환상이다.

도법: 그런데 20세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말하는데 있어서 신중을 기해서 전제를 세워야 한다. 일반적으로 20세기 문명을 이야기하면 항상 서양의 사상과 방법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파괴적이고 잔인한 비인간적인 행태들을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특정인들이 앞장서서 만들어낸 것처럼 단정한다. 그러나 사실 20세기의 문제는 서양 또는 특정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역사에 늘 있어온, 중생들의 보편적인 속성이 나타난 결과들일 뿐이다. 다만 명분이나 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서양이 20세기를 주도해왔다는 점이 다를 뿐, 인간들이 저지른 행태는 동서양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맹목적으로 동양사상을 구원의 빛으로 추종하거나, 동서를 놓고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는 식의 관점으로 20세기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동서를 막론하고 우리는 20세기 역사를 총체적인 덩어리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있어야  동양문화권이나 불교문화권이 20세기를 주도해온 책임은 없다손 치더라도 인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책임의식을 가질 수 있다.

현대문명이 쫓는 편리함이나 인간의 오욕락을 즐길 수 있도록 고안된 많은 것들은 그만큼 독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도 “아름다운 음식이 여기에 있네. 향기가 좋고 맛이 있을수록 거기에는 더 많은 독이 들어 있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문제에 접근할 때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근본적이고 보편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중생의 본질적인 속성, 즉 무지의 욕망을 부단히 쫓아가는 데 있다.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과 결합되어 더욱 극단적인 비인간화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견지해야만 우리가 오늘의 문제를 좀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포착할 수 있으며, 적절한 대안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페터:  도법스님의 의견에 동의한다. 지금 20세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편리함을 지나치게 극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많은 논란을 안고 진행되고 있는 유전자 조작이나 장기대체의 문제들은 인간을 극단적으로 기계화하고 수단화하는 것들이다. 이것은 사실 인간이 작은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엄청난 대가, 즉 자기의 참다운 생명을 말살하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기쁨, 편리함을 위해 자기가 가진 전부를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대문명은 ‘지옥으로 가려고 서두르는 것’이라고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

도법:  부처님 말씀을 빌면 ‘한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무지의 어둠이 인류를 덮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얘기한 무지, 다시 말해서 잘못된 세계관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대개 삶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목전의 자기 편리만을 쫓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당장 나에게는 돈이 필요하지, 맑은 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당장 나에게는 좋은 집이 필요하지, 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자동차가 필요하지, 멀리 떨어져 있는 저 산의 나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 당장에 필요한 부분들을 얻기 위해서 당장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자기 마음대로 취급한다. 그것은 자기 삶을 구성하는 조건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현실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당장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을 등한시 하게 되고 때로는 파괴의 대상 또는 적대적인 대상으로 취급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런 사고와 삶은 방식들이 지금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근원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봤다.

현재 내 생명을, 나라고 하는 존재를, 내 삶을 형성하고 유지되도록 하는 데 있어 물은, 흙은, 저 나무는 무엇인가. 지금 당장은 내 필요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내 삶을 유지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필요한 조건이다. 따라서 내가 바로 물이며, 흙이며, 나무라는 총체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물이나 흙이나 산천초목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삶을 보다 더 근원적이고 총체적으로 파악하도록 가르치셨고, 바로 이런 눈을 갖고 지금의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갈등구조, 대립구조, 파괴구조를 극복해갈 수 있는 길을 열어갈 수 있다.
결국 20세기가 이렇게 극한상황으로 치닫게 된 원인은 불교적으로 보면 오랜 생명활동 과정에서 형성된 무지의 업력이라고 볼 수 있다. 맹목적인 욕망의 논리, 즉 무지에 의한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만 삶의 문제를 풀어온 결과가 바로 20세기 현대문명이고, 동시에 20세기 현대문명이 도리어 인간을 억압하게 되는 질곡에 빠지게 된 것이다.

페터:  그렇다. 이야기하신 대로 현대문명은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욕망의 산물이다.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함 때문에 욕망이 남게 되고 그 욕망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 문명 자체는 무지의 소산이다.
부처님께서는 ‘현자는 자기 자신을 다스린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편리한 것, 자기한테 모자라는 것을 다른 데서 추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만큼, 자기한테 모자라는 것을 다른 데서 추구하는 것 만큼 인간은 소외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훈련시키면 대상을 향한 욕망에서 해방될 수 있다.

도법:  존재 자체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성자는 존재 자체로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마음 밖에서 법을 찾으면 안된다.’라고 하셨다.

페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도가(道家)식으로 표현하면 ‘깃털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쉬운데 실천을 안하는 것이 문제다. 이를테면 자신이 해침 당하지 않으려면 남을 해치지 않으면 된다. 오계(五戒)를 생각해보라. 생명에 대한 계율처럼 아주 단순한 가르침을 지키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도둑질을 하는 것보다 안하는 것이 더 쉽다. 거짓말 역시 안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은가. 쉬운 것은 편한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무지에서 비롯된 욕망에 휩쌓여 그것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쉬운 것이 오히려 어려운 것이 되어버리고, 편안한 것이 오히려 불편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특히 20세기에는 더욱 그렇다.

도법:  연기론적으로 삶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은 관계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네가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고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을 함부로 해치는 대립과 갈등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고방식은 관계의 사고라기보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차이다. 삶의 방법론 자체가 달라져 버린다. 관계성을 이해하면 페터선생의 말씀처럼 상대방을 해치지 않아야만 내가 해침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고를 하게 되지만, 이분법적인 사고에서는 너를 해쳐도 나는 살 수 있다거나 더 나아가서는 네가 없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사고를 갖게 된다.
바로 이런 점들이 삶을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됨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야만 삶의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페터:  우리는 서로 의존하고 있고, ‘네가 없으면 내가 살 수 없는’데도 ‘네가 없어도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대 20세기 이성의 한계이다.
관계성의 눈으로 보면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사람들은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쓰레기가 제3세계에 수출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자기 방바닥에 숨기는 것과 같다. 다 나쁘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총체적으로 그런 것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뻔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대 이성의 한계는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짓증언과 조작, 사기성이 농후한 것이 현대 이성이다.

▶근대문명은 부정의 대상인가, 극복의 대상인가

페터:  근대문명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는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고, 과학자들마저 결국은 진실하지 않은 거짓 정보 위에 서있다. 진실이 왜곡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거짓을 밝히고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그런 사회가 된다면 지금의 이런 사회상황과는 많이 다른 새로운 세게가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방법은 결국 수행의 문제이다. 삶의 현상이나 사회에 대한 편견없는 관찰은 수행에 의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앞에 말했던 것처럼 무지함으로 인해 이룩된 거짓된 삶이 현대문명이라면 그것을 참다운 문명으로 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생태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공해식품을 재배하는 것은 우리가 안전한 식품을 먹는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땅을 살리는 것이며, 생명의 자원을 재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학적인 운동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태고적인 것이지만 태고적인 것이야말로 현실적인 대안이다. 거짓을 진실로 대체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 즉 생태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다.

도법:  불교가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인 깨달음과 사회완성의 입장에서 현대문명에 대한 관점을 세우려면 두 가지 정도의 전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깨달음과 미혹이라고 하는 가치기준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현대 문명을 이룩한 원동력인 중생의 속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미혹과 집착에 의해 이루어진 삶은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그런 원칙만을 갖고 현실문제를 전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두 번째로는 상대적인 비교와 상대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대문명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과 부정․비판하고 극복해야 되는 부분으로 구분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똑같은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한쪽은 빛이 있고 한쪽은 그림자가 생길 수 밖에 없다. 가령 절대빈곤문제의 해결, 생활의 편리, 또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교류와 교감은 욕망의 소산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가 풀어내야 하는 중생적 갈망의 해결이라는 긍정성도 가진다.
그런데 왜 현대문명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그것은 문명화 과정에서 인간들이 자꾸 진실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존재의 실상, 즉 본래 면목의 자리로부터 사람들이 자꾸 이탈되고, 미혹이 더욱 커지게 하는 데 현대문명이 크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종종 ‘옛날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냐’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물질적 부유라든가, 기술적 편리라든가 이런 것들 자체가 절대선이나 절대악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을 선이라는 가치 창출의 도구로 쓰느냐, 또는 악이라는 가치파괴의 도구로 쓰느냐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즉 어떤 세계관과 방법론으로 상황을 다루느냐에 따라 20세기에 이룩해낸 물질적 풍요와 편리한 기술 등이 바람직한 가치 창조의 자원으로 되거나 모순을 재생산하고 인류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가치파괴의 자원이 될 수 있다. 아울러 그에 대한 대안을 말할 때, 그 대안에는 욕망을 절제하는 것도 당연하게 수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중요성을 더 우선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세계관이 분명하게 세워질 때 우리가 맹목적으로 쫓고 있는 욕망, 다른 말로는 생명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욕망의 문제들이 가치창조의 올바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게 하는 길이 열릴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생태운동이나 환경운동 등도 결국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에서 출발해야 제대로 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페터선생 말씀 대로 지금 당장 욕망을 절제하고 잘 다스림으로써 존재의 실상에 대해 눈뜨는 쪽으로 다가가는 것도 눈뜸의 길이고, 지혜의 길이고,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라고 하는 관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모든 것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호간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이해와 인식에서 욕망을 절제하고 창조적으로 쓰는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욕망을 절제하고 잘 다스림으로써 올바른 이해와 인식에 도달하는 방법도 있다. 이 두 방향은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상승작용을 한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론에 있어서는 각 개인의 성향이나 상황에 따라서 접근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페터:  도법스님께서는 현대문명의 이기 자체가 가치중립적이라고 하셨는데, 현대문명이 가져온 결과, 즉 대규모 산업화가 가져온 환경파괴, 비인간화, TV등이 가져온 인간의 참된 커뮤니케이션의 장애라는 결과 등을 보면 근본이 악하다는 것을 알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근본을 치료해야만 한다.

도법:  앞에서 현대문명의 문제가 중생이 갖고 있는 보편적 속성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중생이 갖고 있는 보편적 속성이 고도화된 과학기술과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삶의 필요에 의해 처음에는 괭이를 만들고 마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폐해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첨단기술의 자동차나 컴퓨터에서는 폐해가 크게 나타난다. 기술, 기계라는 면에서는 속성 자체가 같은 것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가. 괭이나 마차를 다룰 때 인간에게는 그것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인간의 심성과 들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게 안 되고 있을 뿐이다. 현실적으로 과학기술과 기계문명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눈과 기술과 조건들을 갖추게 된다면 과학기술과 기계의 고도화가 결코 폐해로 나타나지만은 않을 것이다.

페터:  편리한 것에는 편리한 만큼의 독이 있다. 과거에 괭이나 마차를 사용할 때는 그렇게 편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동차를 비롯한 현대의 도구들이 갖는 편리함을 보라. 현대문명과 과거의 문명은 그만큼 질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에게 칼이나 가위같은 것들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그것을 제대로 다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원자핵, 자동차와 같은 복잡한 도구들, 고도화된 과학기술 자체를 다룰만한 능력이 안간에게는 없다. 과거의 간단한 도구는 이성적으로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인간의 이성적인 한계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어린 아이 앞에 놓인 칼이나 가위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현대문명이 쫓는 편리함이나 인간의 오욕락을 즐길 수 있도록 고안된 많은 것들은 그만큼 독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부처님도 ‘아름다운 음식이 여기 있네. 향기가 좋고 맛이 있을수록 거기에는 더 많은 독이 들어있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도법: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이성주의, 과학주의의 자만이라는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기술과 기계가 발달하면서 현대인들은 세계에 대한 외경심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바로 이런 자만과 중생적 속성인 욕망이 결합되면서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 결과 방향지시 시스템이 고장나버린 자동차처럼 위험스러운 질주를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결국 폐해로 몰고 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이성주의나 과학주의의 자만에서 벗어나 세계에 대한 무한한 외경심 속에서 공손하게 삶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면 20세기 문명의 좋은 점들을 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총체적 관계성의 세계관으로 삶의 문제를 다루어간다면 희망적인 미래의 길을 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아래의 질의․응답은 당일 대담에 동석했던 사람들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 페터선생님은 어떤 교단이나 조직에 속하지 않은 독립적 수행자이고, 도법스님은 우리 나라의 가장 큰 불교종단에 속하시고 또 조직적 활동을 해나가는 수행자다. 페터선생님의 수행방법은 수행자로서 자기완성의 측면에서는 상당히 좋은 방법일 수는 있지만 사회적인 메시지의 측면과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소통방식에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페터:  영국의 태국불교사원과 불교단체에 머문 적이 있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여법하게 수행하는 단체를 보지는 못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고 싶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르침이 너희들의 스승’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선 가르침을 따라서 즉각적으로 실행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러한 삶, 부처님처럼 세간의 욕망을 벗어나기 위해 집을 나와 밖에서, 나무 밑에서 잠을 자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좋은 도반이 있다면 함께 가라’고 하셨다.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좋은 도반이 있다면 함께 가겠다. 그러나 좋은 도반이 없을 때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혼자서 가는 삶을 선택하였다. 맹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인(仁)이 실현되는 커다란 집이 있으면 거기서 살겠지만, 또 인이 실현되는 커다란 길이 있으면 그 길을 걷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홀로 걸어가라.’ 함께 걸을 수도 있고, 혼자 걸을 수도 있다. 함께인가 혼자인가 하는 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사회를 떠나서 나무 밑에서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며 또한 내 삶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숲속에서 거지로 살기 때문에 내가 우연히 만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회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안고 있는 이들 불행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얘기한다. 나는 그렇게 사회와 만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인다면 내가 그들이 처해 있는 그런 사회적인 시스템이나 구조에 동화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소금처럼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소금이 스스로 소금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소금 역할을 하겠는가.

도법: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제도권 안이다 바깥이다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외형적으로 대중과 함께 있으면서 제도 속에 참여하고, 또는 대중과 함께 하지 않고 비제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적으로 얼마만큼 진실하고 성실한가이다. 수행에 있어서는 진실한가 아닌가, 성실한가 불성실한가가 본질적인 문제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먼저 삶을 총체적으로 보는 관점, 둘째는 세상을 향한 애정에 입각해 있는가의 여부 또는 이런 삶의 태도를 올곧게 견지하고 있는가, 그러고 있다면 그 부분에 자기 전존재를 바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 페터선생님께서는 23년 동안 ‘집없이, 돈없이, 여자없이’라는 상황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쫒아 수행을 해오셨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수행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인 동력은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페터: 필연성, 즉 진리만을 추구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필연성은 독일어로 Notwendigkeit라고 하는데, ‘궁핍을 향하는’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령 ‘배고프면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은 그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연성이다. 그러나 내일의 배고픔을 위해 쌓아둔다면 그것은 이미 필연성을 상실한 것이며, 따라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환상에 의존하여 삶을 살아간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돈, 명예, 이성친구, 그리고 때로는 필요한 여러 가지 일상용품일 수도 있다. 그때 스스로 물어보자. ‘이것은 반드시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처음에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들에 계속 ‘반드시?’라는 물음을 던져 보라. 과연 어떠한 여지도 없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더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에 대한 답은 전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듯이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기를 쓰고 쫓고 있지만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환상이며, 진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완전한 곤궁, 즉 어떤 보호나 보장이 없이 완전한 위험 속에 들어가 그 위험을 해결해 나가는 상황에서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집이 없고, 돈이 없고, 여자가 없는 상태로 들어갔다. 주소도 없으며, 의료보험도 없다. 내일 먹을 것도 없다. 욕망을 쫒아가는 관점으로 보면 이것은 최악의 상태이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삶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은 최상의 상태이다. 그 상태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걸림이 없는 그 상태. 그런데도 보통사람들이 들어가 보지 않아서 최악의 상태라고 지레 짐작하는 것일 뿐이다. 처음에는 나에게도 보장성이 하나도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삶으로 들어와 보고 두렵게 여겼던 이 상황이 종이호랑이임을 깨달았다.
나의 삶은 마치 바다에 사는 물고기와 같다. 보통사람들의 삶은 어부의 낚시미끼에 속아서 낚시에 걸리는 물고기와 같다. 나는 거기에 안걸린다. 먹이를 찾을 수는 없지만 바다를 유유하게 다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오욕락을 충족하는 경제활동 속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사는 재가신도들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페터: 부처님은 일반사람들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복을 주려고 한 것이다. 참다운 삶을 주려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은, 즉 탐․진․치(貪嗔痴)라고 하는 것은 질병과 같고, 이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셨다. 수행자들을 위해서는 고행자적인 길을 제시하셨으며, 재가신도들을 위해서는 아주 부드러운 길을 제시하셨다. 두 가지 길이지만 둘 다 인간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신 것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와서 말했다. “저는 아름다운 부인과 많은 아이들과 재산과 명예를 갖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런 길이 있다. 네가 다른 사람한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죽이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재산을 뺏기지 않으려거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뺏지 말라. 네 처자식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해침을 당하지 않으려거든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라. 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고 싶거든 다른 사람을 도와라. 그렇게만 하면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부처님께서 한마디 덧붙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불행한 사람에게 둘러쌓여 있으면서 어떻게 혼자만 행복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다.

▶ 아무리 좋은 윤리나 도덕이라도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근대문명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데, 실제로 사람들은 그것을 안고 달려가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가고 있는데, 선생님 혼자 떨어져 나와 ‘내려 놓았다’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페터: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 유럽에서는 양심있는 지식인들이 적어도 그런 위험한 장난감들이 극도로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류를 그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노력하고 있으며, 또 근대문명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많은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혼자 수행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인도의 성인 하피스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았을 때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다. <자타카>에서도 ‘먼저 스스로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공자 역시 ‘행동보다 말이 앞서서는 안된다.’고 했다. 나는 아직 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행동으로 그런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성자 까빌라가 말하기를 ‘어디를 가든지 스승은 있었지만 학생은 없었다.’고 했다. 또 ‘도시에서 도시로 전전하면서 온갖 황금에다 화려한 것이 있는데, 정작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으려고 보니 사막이었다.’고도 했다.

세상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이야기 될 것은 이미 다 이야기되었고, 책은 넘치고 있다. 방향은 조금씩 다르지만 다 나와 있다. 나의 생각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거기에 무엇을 더 덧붙이겠는가.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처방전은 다 있으며 지금 중요한 것은 처방전대로 약을 먹어보는 것이다. 예수도, 부처도, 노자도, 까빌라도 그랬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행동할 것을 가르쳤지, 가르침 자체를 가르친 것은 아니다.


출처: 인드라망 창간호 2000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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