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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수 있는 사회와 유기농업운동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16:24 64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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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수 있는 사회와 유기농업운동
이정호(생협이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처장)


대한민국, 2005년의 '고용 없는 저성장' 논란
 2005년 상반기를 지나면서 대한민국에서는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정통적인 경제학적 개념에서 '경제성장'은 곧 '고용증대'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성장률의 원천은 수출의 증대다. 수출증대는 곧 활발한 생산증대를 의미하며 이 생산을 위해서는 설비투자와 고용증대가 필수였다.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한 논란은 이 선순환 구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 상반기에 분명히 '약 3.6%의 성장'은 이뤄지고 있는데 그에 따른 고용증대 효과는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경우 2003년도에 3%대의 저성장에 고용의 감소를 경험했고, 2005년도의 하반기 성장률이 5%를 넘지 못하면 이 걱정되는 상황이 재현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이 상황의 원인을 우리나라 경제회복의 효과가 늦게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 찾는다. 하반기에 꾸준히 경제성장을 추진한다면 서서히 우리경제의 회복효과가 고용에도 영향을 주리라는 진단인 것이다. 그리고 또 많은 전문가들은 현재와 같은 상황을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주술로 표현하면 안 된다고 강변한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높은 경제성장밖에 없다고 일갈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경제학적 신조어가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이미 유럽사회에서는 '저성장 고실업'이라는 사회현상으로 굳어져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고용 없는 성장' 현상이 나타나고, 2003년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성장'과 '고용 증대'의 엇박자는 자본의 세계화가 적극적으로 진행된 나라일수록, 소위 선진국일수록 먼저 경험하고 있는 문제다.


'고용 없는 성장', 건설경기 부양으로 극복 가능할까?
 현재 사회적 양극화에 대해 불만들이 많다. 이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 시기에 이는 여러 가지 원인이 발생시킨 결과에 해당한다. 그 원인 중에 큰 것이 실업자의 증가와 비정규직의 대규모 양산이다.

 지난 DJ 정부 시절 유명한 '아랫목-윗목론'이 있었다. 한 집안에 아랫목이 뜨거워지면 점차 윗목도 뜨거워지게 된다는 논리다. 이를 기반으로 DJ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법을 받아들이도록 했으며, 나아가 우리사회를 국제화, 세계화시키기 위해 IMF의 요구에 따라 산업구조 조정을 진행했다.

 그 결과 최근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부는 더욱 양극화됐다. 1%의 땅 부자들이 이 땅의 43%를 차지하고 있으며 10%의 땅 부자들이 75%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20 대 80'의 사회를 넘어 '10 대 90'의 사회를 향해 가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예는 많다. 소득에 있어서도 이미 상위 10%의 수입은 하위 10%의 수입의 수십 배를 넘고 있다.

 이런 자명한 현실 앞에서 '아랫목-윗목론'이나 노무현 정부식의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론은 단지 '선택과 집중'된 사람들에게 몰아주기로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넘어서기 어렵다. 국민의 상당수에 해당하는 100만 명의 실업자와 800만 명의 비정규직 종사자들에 대한 안정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이 양극화의 경향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노무현정부의 대책은 '대선의 수도 이전론→총선 시절 지역 토호들의 연합체 건설→행정중심 복합도시 확정→시범 기업도시 선정→공기업 분산을 통한 혁신도시 건설'로 이어지면서 건설경기 부양을 통한 경기 활성화의 희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건설경기 부양론이 '건설 경기발 금융위기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며, 실업 대책에 있어서도 장기적인 대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구나 이런 건설 산업이 초래할 결과에 있어서 확실한 것은 '국토 생태계의 파괴'와 '사회적 양극화의 지속'이다.

 국토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우려는 반복할 필요가 없겠고, '사회적 양극화의 지속'이라는 결과는 현재 매일 벌어지고 있는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있어서도 아파트에 대한 우려와 대책은 있어도 농지와 토지에 대한 투기대책은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신 올 6월 국회에서 이미 우리나라의 농지법은 '경자유전 원칙'을 위반하도록 바꾸어 놓았다. 이제 서울의 큰돈들이 마음껏 '퇴역 농부들'의 논과 밭을 소유할 수 있도록 농지법이 바뀌었으며, 약 5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면 그 농지는 개발지로 바뀔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제 이 땅의 농지와 토지는 개발지로 서서히 바뀌어 갈 것이다.


'실업사회', 대안농업 운동으로 극복하자
 대한민국에서는 농업ㆍ농촌의 문제가 농민의 문제로 치환되었다. 그러나 농업과 농촌의 문제는 식량주권의 문제이며, 국민의 건강권과 국토 생태계 안전의 문제다. 그러나 농업과 농촌의 문제를 단지 일반상품의 문제로 여겼다. 그래서 자유무역론에 입각해 공업 제품에 대한 경제적 기회비용으로 단순화시켰다. 급기야 우리나라는 농업ㆍ농촌문제를 단지 농민들의 피해를 줄여주는 선에서 다뤄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제적 논리는 '국제시장에서의 안정적인 식량공급'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 공급되는 식량 가격이 우리가 원하는 가격(공산품 수출로 인해 벌어들이는 것보다 작아야 함)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국제 농산물 시장의 추이는 향후 공급되는 식량이 절대적으로 모자랄 수 있으며, 그것의 가격도 그리 안정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 큰 상황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농업과 농촌의 문제를 농민들만의 문제로 치부한 데에서부터 잘못된 것이다. 농업과 농촌을 포기하는 것은 단지 농민들이 없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한 국가의 모든 국민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다.

 현대사회에서 농업의 문제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농업이 갖는 미래의 가치는 무궁하다. 이를 실업문제를 중심으로 잠시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유기농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유기농업은 집단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전국의 농촌에 유기농업단지를 중규모로 추진하고, 이것의 주체로 50명 단위의 생산자 협동조합을 만든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현재 전국적으로 귀농학교를 졸업한 약 5000명의 사람들과 지역의 주민들이 함께해 약 200개 정도의 협동조합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약 10억씩만 지원하더라도 약 2000억원이면 충분하다.

 그러면 정부에서 행정수도를 위해 쓴다는 약 10조원 정도면 앞으로 10년간 25만 명의 새로운 농업 일꾼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것뿐이겠는가? 이를 통해 파급되는 새로운 고용효과는 굉장할 것이다. 이 계산을 확대하면 더욱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갈 수 있다. 4배의 돈이면 100만 명의 새로운 농업인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향후 '일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전망은 국민경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이를 농업과 농촌에 대한 새로운 가치부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면 이를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이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환경ㆍ생태 운동가들부터 근거지를 '서울'에서 '농촌과 지역사회'로
그런데 한 가지 장애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의 존재 방식'을 시급히 이동시켜야 한다. 내 가치관과 내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하는 일이 선결 과제다. 그 옛날 80년대 초반의 노동운동가들이 자신의 존재를 공장지대로 이동한 것처럼, 생태운동가들은 먼저 자신의 존재를 농촌과 지역사회로 이동해 가야 한다.

 어차피 우리세대의 삶은 대도시에서 농촌과 지역사회로 내물릴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떠밀려 할 것인가? 내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갖고 주체적으로 할 것인가? 이것이 다를 뿐이다.

 지금 서울과 부산에는 일반 시민들뿐 아니라 사회운동권조차 너무 집중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희망과 전망을 내놓기 어렵다. 우리의 삶을 이동하면서 새로이 학습해야 한다. 그 동안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버렸던 농업과 농촌의 가치, 마을공동체와 지역사회의 가치, 인간과 자연의 공존, 인간 간의 협력과 협동의 가치 등에 대해 새로이 학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도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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