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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와 ‘생명운동’의 만남, 친환경공양미운동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16:32 74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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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와 ‘생명운동’의 만남, 친환경공양미운동
이정호(생협이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처장)


1. 나의 삶속에서 우리나라 농업․농촌의 의미

도시의 일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우리나라의 농업․농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농업농촌의 일이 나의 이해관계와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갖지 않다는 생각이 큰 장벽이다.
도시에서 먹을거리는 돈을 가지고 대형마트나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돈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만 정통하면 되지,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 ‘먹을거리’인 것이다.
도시의 삶속에서 먹을거리는 단지 돈을 주고 거래하면 그만인 ‘상품’이다. 그렇기에 그 ‘상품’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고, 어떻게 가공되고, 어떻게 유통되는지에 대한 것은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안정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돈을 버는 행위 즉 아파트투자나 증권이나, 토지투자 등에 대한 일에만 관심이 높다.
장벽이 이것 하나라면 그래도 괜챦다. 정말로 문제는 다음이다.
우리나라의 농업농촌이 제대로 갈려면, 공산품 수출이 위협 받게 된다는 입장에 서게 되면 농업농촌은 그야말로 천덕꾸러기가 된다.
이제 농업농촌은 나의 삶에 있어서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가 아니게 된다. 우리의 화려한 도시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쪽으로 찌그러져야 하고,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도시의 삶과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대상인 것이다.
산업사회가 본격화되기 이전 우리사회는 농업과 농촌에 기반한 사회였다. 그때의 농업과 농촌은 곧바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이었으며, 우리 형님과 언니와 누나들의 삶의 무대였다. 또 우리들 추억의 대부분은 그곳에 남겨져 있다.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식량공급처는 우리나라의 농업과 농촌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식량은 미국 및 캐나다, 호주 등 세계의 곡물수출국가들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5%를 밑돈다. 우리가정의 네 끼 중에 세 끼를 그 나라들에서 안정적으로 식량이 수입되어야 우리나라 도시인들의 생존이 가능한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의식있는 사람들은 ‘지금은 국제농산물 값이 싸다. 그러나 10년이후에도 값이 지금과 같이 쌀까?’라는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 우리사회가 미래의 희망으로 여기는 반도체나 자동차나 컴퓨터를 능가하는 가치로 식량의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다시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사회가 농업농촌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것일까? 농업농촌에 대한 오늘날의 이런 대접이 후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불교의 인과응보의 원리로 보면 답은 뻔하다. 그래서 농업농촌의 문제를 더 이상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닌, 농민과 도시민 모두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시급히 회복되어야 할 때이다.
나와 나의 아들세대와 나의 손주 세대의 삶과 농촌농업의 문제가 아주 밀접하고 소중하게 여겨질 시기가 멀지 않았다고 본다. 마치 물과 공기가 흔할 때 그것의 고마움을 모르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것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듯이 먹을거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


2. ‘사회평등’과 ‘생태건강’이 함께 하는 지속가능한 사회

요즘 세간에는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사회의 전 분야에서 부와 권력 그리고 각종의 이권에 관한 뚜렷한 쏠림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20대 80의 사회’를 지나 '10대 90의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러한 양극화속에서는 사회통합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이다. 불자의 입장에서는 일단 이러한 우려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너무 크게 사회가 울퉁불퉁한 것은 사회갈등의 원인이 되고, 이는 불자들에게 있어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아직 우리사회는 이런 사회불평등의 문제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다 더해서 지난 90년대 이후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사회는 사회평등성과 함께 ‘생태건강성’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매년 심해지는 도시의 공해와 물의 오염 그리고 먹을거리의 오염 등이 도를 넘어서고 있기에 그러하다.
물과 공기, 먹을거리의 오염으로 요즘 아이들은 아프다. 매일 받는 밥상은 농부의 고마움을 느끼는 대신 오염으로부터 안전한지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텔레비전에서 비쳐지는 자연재해나 이상기온이 산업사회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현대문명과 관계가 깊다는 진단은 우리를 불안케 한다.
‘오염으로부터 우리사회가 안전한가?’라는 질문과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또 다른 형태의 ‘생태건강성’의 문제는 에너지위기로부터 비롯된다.
날로 높아가는 석유에너지 가격이 걱정이다. 현대사회는 석유에너지에 의해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구조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이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석유’를 많이 사용하여 공업생산물을 생산하고, 수출하여야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구조이기에 더욱 걱정이 크다.
만일 고유가가 충격적으로 우리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나라가 능히 이 시련을 견디지 못하면 ‘오염된 공기와 물 그리고 먹을거리’라는 걱정보다 훨씬 더 큰 ‘지구차원의 생태건강성’에 대한 위협이 현실화 될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주변 현실은 엄중하다. 우리사회가 ‘사회평등성’과 ‘생태건강성’을 유지하여 지속가능한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가야 할 시기이다.
불자들은 근본에서 생각하도록 배워왔다. 올바른 관점과 바른 문제의식이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 기본이다. 화려한 도시의 일상을 지탱하는 뿌리는 ‘식량과 에너지’이다. 이 두 가지 문제가 지속적으로 사회에 공급되어야 일상이 가능하다.
농업을 친환경농업으로 전환하는 문제는 우리국토의 생태계균형을 맞추는 일에 있어서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고유가 시대를 넘어서는 지혜로운 선택이기도 하다. 나아가 아토피로 아픈 세대인 우리아이들의 건강을 지켜내는 선택이기도 하다.
향후 고실업사회를 살아가야 할 세대에게 중요한 일자리를 만드는 선택이기도 하다. 이 일은 가장 크게는 지속불가능이라는 진단을 받고 있는 ‘산업도시문명’을 대체한 새로운 ‘생태문명’의 기초토양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사회는 어떤 선택을 준비하고 있는가? 묻고 싶다.


3. ‘불교전통’과 ‘생태생명운동의 가치’가 만나는 친환경공양미운동

1) 공양미와 불교전통문화
예전에 우리 어머니는 뒷산에 있는 ‘미륵사’에 가시는 날은 몸을 단정히 하셨다. 그리고 강원도에선 꽤 귀하던 쌀을 한 되 담아 길을 나섰다. 그 곁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섰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곤 뒷산 꼭대기에 위치했던 미륵사를 힘겹게 올랐다. 가져간 쌀은 공양미로 부처님전에 올려졌다. 그 외에 어떤 공양물이 올려졌는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쌀은 그렇게 나의 기억속에 불자의 정성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우리 역사속에서도 ‘공양미 삼백석’은 용왕을 감동시킬 수 있는 효녀심청의 정성으로 상징화 되어 있다. 아직도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은 절의 공양미 전통을 통해 이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실제 사찰의 공양미는 사찰의 스님과 신도 등 사부대중의 대중공양물로 그리고 사찰과 유관한 여러 복지시설과 교육기관의 공양물로 쓰여 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의식과 문화가 희박해지고 있는 것 같다. 단지 공양미를 기복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거나 간편하게 ‘돈으로 대신하면 되지’ 하며 불편한 격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우리사회의 어느 것이나 그렇듯 이어갈 가치가 있는 것과 반드시 개선해야 할 것이 있다. 공양미의 전통은 개인의 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으며, 불교신앙문화로서도 대중공양의 징표로서의 기능을 가지며, 사회적으로도 복지를 통한 사회회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복합의미를 가지는 불교전통은 충분히 이어갈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는 불교계는 지속적으로 전통을 이어갈 현대적 재해석 작업을 잘 진행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2) 지속가능한 생태사회와 친환경공양미
현재 우리나라의 농업농촌의 미래는 ‘친환경농업’과 ‘친환경농산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지속가능한 농업’이 이 친환경농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각종의 도시문제로 괴롭다. 도시오염과 교통지옥 그리고 대규모의 실업사회, 작아지는 경제성장률로 괴롭다. 그리고 농촌문제로도 괴롭다. 외국의 통상압력에 의한 ‘쌀수매제도 중단’, ‘계속되는 이농인구’, ‘농촌공동화’ 등으로 더 이상 농촌에는 아이들이 생겨나지 않는 곳이 되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도시와 농촌간의 단절이 가장 크다. 도시와 공업을 초고속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농촌과 농업을 희생한 대가이다. 도시와 농촌의 조화로운 공존을 생각지 않아서 문제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도시와 농촌을 도시는 도시로 그리고 농촌은 농촌으로 보아서는 해결할 수 없다. 도시와 농촌은 본래 한뿌리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농촌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도시문제의 절반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도시는 사람이 너무 많아 생겨나는 문제이고, 농촌은 사람이 너무 적어 생겨나는 문제이다. 그러하니 농촌으로 사람이 이동하면 문제가 풀려나갈 것이라고 본다. 이 흐름을 만드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농촌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가는 문제이다.
아직 우리사회의 정책당국자와 정치인 그리고 힘 있는 곳에서는 이 사실을 믿지 않고 있다. 너무나도 간단한 원리이지만 ‘비교무역론’이나 ‘경제성장의 신화’를 신봉하고 있는 곳에서는 이 원리를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친환경공양미운동은 ‘오랜 불교문화’와 21세기의 생태생명운동의 ‘핵심가치’가 만나는 사안이다.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살만한 농촌’을 위한 거대한 한걸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불교계는 이러한 원리를 이해할 토양이 넓은 곳이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과 불살생의 생활원리가 교육되는 곳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중요사찰이 농촌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꽤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종단을 통해 도시사찰과 농촌사찰이 기초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4. 친환경공양미운동의 대중화를 염원하며...

친환경공양미사업은 불교의 오랜 전통인 ‘쌀을 공양하는 문화’와 ‘친환경쌀’을 연계하여 여러 불자대중들에게 제안하고 있는 사업이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우선 2005년 1월 17일에는 ‘봉은사’와 ‘친환경공양미 협약식’을 맺어 친환경쌀을 공급하고 있으며, 태고종봉원사 및 삼보법회에도 공양미를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8월에는 부산의 홍법사와 협약식을 맺었다.
100가마의 친환경공양미는 약 6천 5백평의 논을 친환경농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양이며, 이는 농촌사찰을 중심으로 한 ‘친환경농업지구’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좋은 근간이 될 수 있기도 하다.
불광사의 회주스님과 여러 스님들의 결심과 불광사 사부대중들의 관심으로, 지난 9월 11일 ‘인드라망생명명공체와 불광사’간에 친환경공양미 협약식이 체결되었다. 불광사의 동참으로 횡성지역과 실상사인근지역의 대중들과 전북김제의 농부들이 지속적으로 친환경농업을 실천할 수 있는 토양이 그 만큼 넓어지게 되었다. 기쁜일이다.
며칠 전 ‘전북지역의 학교급식조례제정’이 대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학교급식을 ‘우리농산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우리들 2세에게만이라도 안전한 우리농산물로 먹이자는 내용이다.
우리 생명운동의 관점에서는 ‘우리농산물’이 아니라 ‘친환경농산물’이라는 것이 더 좋지만, 아직 시기적으로 우리사회의 인식이 그걸 따라주지 못하기에 아쉽지만 ‘우리농산물’이라는 표현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러한 ‘우리농산물’을 의무화하는 조례마저도 외국의 ‘통상압력‘을 우려한 대법원에 의해 어려움에 처한 것이다.
사실 일본의 대법원의 경우 이런 지방조례에 대하여 ’판결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판례가 있다. 그리고 지금 일본과 미국, 유럽의 여러나라는 자국민의 노력과 외국의 묵인해 의해 ’자국의 농산물‘로 자국 아이들에게 학교급식을 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농촌을 지켜가고, 생태사회를 위한 기초토양을 만들어가는데 있어 친환경농산물의 안정적인 소비처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학교급식을 통해 그것을 시작해 보려는 사회단체들의 노력은 큰 상황이다. 그래서 상심이 크다.
절이나 성당 그리고 교회에서 신도대중들이 먹는 공양물을 친환경농산물로 전환하는 운동을 시작하는 것은 이러한 노력에 큰 힘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땅의 종교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사회로부터 요구받고 있다.
친환경공양미협약식은 이에 대한 불교계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향후 이러한 운동이 주지스님을 중심으로 한 ‘협약식’에서 머물지 않고, 신도대중들이 직접 동참하는 ‘친환경공양미 실천서약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준비를 꾸준히해야 지속적인 대중운동으로 발전해 갈 수 있을 것 같다. (2005년 9월 월간 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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