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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는 꿈을 꾸고 있는가?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16:37 7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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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는 꿈을 꾸고 있는가?
이정호(생협이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처장)


1. 2000년대의 사회적 꿈 - 사회적 평등과 생태적 건강성이 살아있는 사회

1) 8-90년대가 남긴 가치
우리사회의 80년대는 사회적 평등과 국가적 자주성 실현이 최대의 과제였다. 일단 이 두가지 과제를 평등성의 실현이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가 국내적으로 적용한 것이라면 뒤의 것은 국가간에 적용한 문제로 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사회의 평등성의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일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앙정부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과 ‘노동자 - 민중’의 사회적 공민권 획득이라는 절차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사회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지역정부의 민주화, 경제의 민주화, 가정의 민주화, 성역할의 민주화 등이다.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직도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역주민들이 지역정부의 좀더 주체가 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역정부와 중앙정부간의 관계도 좀더 민주적인 관계가 될 필요가 있다. 경제적으로 우리사회는 ‘20대 80’의 흐름을 막을 필요가 있으며, 가정속에서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속에서 민주화는 여전히 과제이다.
우리사회에서 90년대는 모색의 시대였다. 하나의 축이 세계화에 대한 모색의 시기였다면 다른 하나의 축에서는 이 땅의 진보와 민주주의적 발전에 관한 새로운 모색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하나의 축에서는 다운사이징, 아웃소싱, 노동의 유연화, 자본의 자유화, 무역의 세계화를 준비했다면, 다른 축에서는 지속가능한 생존과 생태적 각성, 생명평화의 원리, 지역사회 민주화, 풀뿌리민주주의 운동 등에 대해 성찰하고, 준비하는 시기였다.
90년대를 통해 우리사회는 앞의 축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어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2) 생명평화 페러다임 제안
생명평화의 페러다임은 80년대와 90년대를 맥락적으로 연속적으로 보되, 이 둘을 동시에 지양하는 성찰의 과정에서 생겨난 사고방식이다.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각성은 우리사회가 전쟁과 강제적 근대화의 비극을 통해 아직도 영향을 받고 있는 역사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평화에 대한 각성은 인류역사적으로 적대적인 양극체제속에서 길들여온 삶의 패턴을 넘기 위한 몸부림으로 생겨난 것이다.
생명평화는 8-90년대의 성찰과 각성의 결과이긴 하지만, 미래에 대한 대안의 역할도 있다.
생명평화의 눈으로 보는 21세기 우리나라의 중요 과제는 ‘사회적평등성’과 ‘생태적 건강성’을 동시에 지켜가는 일이다. 이일의 선두에는 우리사회가 현재 우리농촌과 농업에 대한 제대로 된 위상정립을 통한 ‘제대로 된 대접’을 하는 작업이 서 있다.
우리사회가 농업농촌에 대해 제대로 대접할 줄 알게 되면, 거기에는 산업사회가 필연적으로 배태한 ‘20대 80사회’의 문제를 풀 열쇠가 있으며, ‘저성장 고실업’사회를 풀어갈 지혜가 숨겨져 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가 생명이 안전하고, 평화가 실현될 수 있는 초석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이제 우리사회는 이런 꿈을 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 그 꿈을 실현할 사회경제적 토양을 준비하고 있는가?

1) 생명평화의 삶이 필요하다
우리와 우리의 미래세대가 살아 갈 사회에 대한 꿈을 그리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까지 얘기했던, ‘사회적 평등실현’과 ‘생태적 건강성’은 80년대와 90년대를 통과하면서 만들어낸 중요한 두 축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두 가지 과제는 현재 우리의 현재의 삶에서는 요원하다는 것을 뜻한다.
장애요인을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 이 장애요인은 현실에서는 가치관이 좌우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치관의 근저에는 ‘삶의 방식’이 놓여 있다.
우리사회의 많은 대중들의 삶의 방식에는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 농촌과 도시의 불평등, 중앙과 지역의 불평등, 지역간 불평등, 계급과 계층의 불평등,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를 전제해야만 유지 가능한 이해관계가 깔려있다.
마찬가지로 ‘생태적 건강성’을 추구하면 안되는 이해관계, 즉 생태적 건강성을 파괴해야만 생산이 가능한 생산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그대로 전제하고는 우리가 원하는 ‘사회적평등’과 ‘생태적 건강성’을 추구하는 바람은 공염불이다. 현재 우리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3차 서비스산업과 제조업사업 중 대부분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인간을 위한 자연파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 어떻게 존립 가능하겠는가?
이러한 이해관계에 입각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한, ‘사회적 불평등’과 ‘생태적 불건강성’의 가치관은 우리의 습관에서 멀어질 수 없다.

2) 땅과 전략적으로 연대하는 삶
2005년 현재, 우리나라의 돈들이 투자처를 찾고 있다. 정부에서는 건설산업에 이 돈들을 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전국에 산재한 농지에 돈들을 들이고자 한다.
정부의 계획은 ‘돈과 땅’을 연결하고자 하고 있다. 실로 거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신도시와 관광지를 그 땅에다가 만들어갈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그를 통해 10년 후에 남게 될 것은 파헤쳐진 산하요, 망가진 강줄기요, 더럽혀진 공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소수의 땅부자들이 큰 소리치는 불평등은 여전할 것이다.
생명평화의 사회경제적 토양은 ‘사람과 땅’을 연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도 미래사회에 가장 큰 과제인 ‘일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해야 할 것이다.
땅이 단지 부동산을 통한 재산증식의 수단이 아닐 수 있도록, 그리고 땅이 멀쩡한 농지를 나대지로 바꾸어 개발지로 바꾸어 가기 위해 도시자본에게 넘어가는 운명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땅에서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먹고 살 식량이 생산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생명의 안전과 평화적 녹색국가의 토양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와같은 시대적 과제를 정확히 이해한 사람들과 우리나라의 토지가 연결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생명평화국가에 대한 긴 여정은 이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새로운 사회운동을 추구하고, 생명운동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세력들이 ‘유기농업과 농촌의 재발견’에 대하여 거의 목숨 거는 이유가 여기 있다. 땅을 살리고, 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늘어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추구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자신의 존재적 특징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바탕하여 자신의 존재를 먼저 바꾸어 갈 사람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평화롭게 살기 원하는가? 그러면 땅과 평화롭게 지낼 전략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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