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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운동의 대중화와 토지문제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16:48 65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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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운동의 대중화와 토지문제
- 비노바바베와 헨리조지의 만남을 반가워하며 -
이정호(생협이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처장)


1. ‘불교귀농학교’라는 이름으로 소위 귀농운동을 시작한지도 어언 7년을 넘어서고 있다. 지난 7년동안은 새로운 학습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전에는 노동자 - 민중의 현실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학습을 주로 진행하였던 것에서 ‘농업’과 ‘환경’ 그리고 ‘지역과 생태, 생명, 공동체’ 등등에 관한 학습을 진행하였다.
불교귀농학교를 통해 약 400여의 사람들을 접했다. 그리고 귀농전문학교에서는 약 200여분의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 이외에도 생협운동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수백명의 분들과 접할 수 있었고, 나아가 지리산살리기운동 등 환경연대운동을 통해 또 일군의 활동가들과 지역민들과의 만날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많은 수의 토론들이 술을 먹고, 혹은 맨정신으로 혹은 차를 한잔하며 진행되었다. 그렇게 나와 나의 주변사람들은 토론하며, 혹은 갈등하며 자신의 삶의 방편을 바꾸어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방해물이 있다.
그 중에서 으뜸이 ‘두려움’과 ‘땅값’이다. 두려움은 외로움과 문화적 소외감, 생소한 것에 대한 막연한 걱정, 아이들 교육 등등이며. 땅값은 땅을 구입하기 위한 자금과 정착시기에 버티어 나갈 운영자금에 관한 것들이다.
외로움과 문화적 소외감은 함께 귀농을 준비하는 것으로 아이들 교육은 어쩌면 ‘자연과 함께하는 교육’이라는 것으로 다소의 위안감을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것에는 ‘화해와 평등의 인간관계’라는 큰 과제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2. 땅값에 대한 고민은 대단히 현실적이며,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결코 녹녹치 않은 문제이다. 예를 들어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귀농을 결심하면, 최초로 땅과의 만남을 계획해야 한다. 현재의 방법으로 그것에 접근하고자 하면 평균 5만원대의 땅을 구한다고 했을때, 최소한의 자립에 필요한 2천평의 땅을 사려면 1억원의 자금이 필요하다.
최소화 시켜 1천평의 땅을 확보 하더라도 5천만원이 필요하다. 여기에 가정이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2-3년간의 가정운영자금이 약 3천만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매년 땅을 개간하고 그것을 농사에 적합한 곳으로 만드는데 약 3천만원의 자금이 들어갈 것을 가정하자. 그러면 향후 약 2-3년 동안 약 1억 1천만원에서 1억 6천만원의 자금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주먹구구식 계산으로도 이러하다. 여기에 귀농의 성공가능성이 매우 낮고, 위험부담과 안정적이지 못한 사회적 상황 등이 고려된다면 위험비용과 심리적 압박감은 매우 클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뒤의 것은 생략하고 앞의 자금만 가지고 보더라도 삼십대 중반의 사람들중에 현재 1억원이 넘는 돈을 탈탈 털어서 귀농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한정되어 질 수 밖에 없다. 그 사람들은 ‘시대의 지사’이며 ‘현대판 독립운동가’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20대의 사람들은 몇몇 측면에서는 가정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귀농에 유리할런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아직 돈이 없다. 한 10년은 준비해야 그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건이 될지도 모른다. 기껏 이것저것 따져봐야 40대중반을 넘긴 사람들이 얼추 귀농준비에 관한 경제적 토양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50을 넘어버리면 농사를 통해서는 개인적 수행과 여생의 안정화를 넘어서서 ‘사회적 의미’를 되새길 시기는 지나버리고 만다.
땅값의 문제는 현재까지 ‘사상운동’으로서의 귀농운동의 성립가능성은 훌륭히 확인할 수 있지만 ‘대중운동’으로서의 귀농운동은 요원한 일이 되고 있는 중요 요인이기도 하다.
지난 시기를 거치면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땅값의 문제를 풀어야겠다는 것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6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서울의 경우 땅값이 수만배 수직상승했으며,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수백배 - 수천배 상승했다. 현재의 지가총액으로 치자면 우리나라를 팔면 캐나다를 다 살 수 있는 액수라고 한다. 1,500조에 달하는 지가를 자랑하는 나라이다. 지가에 관해서는 미국, 일본과 절대액에서나 상대적으로나 1-3위를 번갈아 다투고 있다.(이정우의 글 참고)


3. 약 2년전에 한명의 스승을 뵈었다. 비노바바베와의 만남은 아직도 큰 감명으로 남아있다. 비노바의 일생은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점철되었으며, 다른 시간은 아쉬람에서 공동생활로 보냈다. 약 20여년에 걸쳐 인도전역을 돌아다녔으며 그 과정에서 토지헌납운동을 벌였다. 당시에 그는 약 400만에이커(1에이커는 굉장히 많은 단위라고 한다. 자세히는 모르겠다)를 헌납 받아 농업노동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비노바의 ’토지헌납운동‘으로 인해서 남부인도 하이데라바드 근방에서는 토지가 없는 농민들과 지주들 사이에 소요사태가 벌어졌다...비노바는 어떻게든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 그 지역으로 갔다. 한 마을에 살고 있던 땅 없는 40여명의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서 땅 80에이커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주중에 하나였던 라마찬드라 레디는 비노바를 만나 감동을 받고 전례 없이 그의 땅 100에이커를 선뜻 내놓겠다고 제안하였다... 땅이 없는 가족들은 원래 자신들이 청했던 80에이커만 받겠다고 말했다.“

비노바와 만나게 되면서 그가 몸소 행한 일에 대한 대단함에 대하여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와 함께 감동을 준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인간관’에 관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삶에 대한 대단한 통찰이었다.

“한집을 예로 들어봅시다. 당신은 그 집에 들어가고자 하나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그러면 당신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작은문 하나를 발견하다면 그 집에 들어갈 수 있고 또 당신이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문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주를 만나보면 그는 많은 결함과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이기심은 마치 벽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작은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작은 선함이 그것입니다. 당신은 그 문을 찾으려고 준비하면서 당신 자신의 이기심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그가 어떠한 결함을 가지고 있던 개의치 마시고 문을 찾으십시오. 가끔은 나도 문을 찾지 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결함은 내가 그의 단점들에 대항해서 내 머리를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비노바바베의 정신의 순결함과 그의 용기있는 행동에 대한 감동을 지워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감동이 곧바로 현실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몇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것은 개인적으로 이러한 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던 것에 있다.
당시 하나의 의문이 있었는데, 비노바 당시의 인도는 농경사회였고 토지헌납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것을 절실히 원하는 사람들이 있던 시대가 만들어낸 운동형태였을 거라는 문제였다. 지금의 우리의 현실은 이미 도시화, 산업화가 훨씬 진행되어 버려서 농경사회의 전통이 없으며, 나아가 토지헌납운동을 절실하게 바라는 사람들이 이미 도시로 떠나버린 상황에서 그것은 시도하기 어려운 운동이겠거니 생각했다.


4. 이제 더 이상 토지는 사회변화의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헨리조지를 만나기까지 이러한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단지 귀농자들을 위한 사상교육과 그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귀농운동과 생명운동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보다 장기적으로 문제를 다루어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의 생각을 다소 바꾸는 계기는 헨리조지의 정치경제학을 만나면서였다.

“(100년전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헨리조지가 잊혀진 이유)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20세기 내내 세계를 양분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론적 근거인 신고전학파와 좌파 경제학이 헨리조지사상과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조지의 사상은 토지문제를 핵심으로 하는데 반해 신고전학파와 좌파 경제학은 모두 토지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고전학파는 헨리조지 사상의 토대인 고전학파(리카도 등)의 토지관을 버렸고 헨리조지가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토지지대도 다른 생산요소의 대가와 다름없다고 보았다. 또한 헨리조지사상은 토지를 제외한 재산의 사유 및 경제활동의 자유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사회화 및 계획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본질적으로 융화될 수 없었다.”(김윤상의 글 참고)

헨리조지는 1839년에 미국에서 출생하여 1897년에 죽은 사람이다. 그는 온 생애를 관통해서 하나의 현상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사회가 진보(인구성장, 기술발전 등)함에도 광범위한 빈곤’이 함께 한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풀기위해 조지는 ‘프랑스의 중농주의 학파’에서 얘기하던 ‘경제에는 자연적 질서가 존재하며 토지가치를 공적으로 징수하는 것은 바로 그 자연적 질서에 부합된다’라는 지대단일세의 사상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으며, ‘진정한 자유거래’의 사상도 도출하였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자유거래란 ‘거래의 자유’뿐 아니라 모든 생산에 필수적인 자연자원에 대한 접근의 자유를 포함하는 ‘생산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헨리조지의 토지사상은 ‘지대단일세’라는 큰 축과 ‘자유무역’이라는 보조축으로 크게 구성된다.
이러한 결론을 도출해 가는 헨리조지를 잠시 따라가 보자.
헨리조지는 당시에 통용되던 정치경제학의 기본 대전제인 임금기금설과 인구론을 부정하면서 물질적 진보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원인을 생산물 중 일부가 토지소유자에게 지대로 귀속되는 토지소유제도에 있음을 증명하였다.
토지는 원래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또한 사적소유자의 노력에 의하여 토지가치가 매겨지지 않고, 단지 주변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면서 가치가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토지의 사적소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 토지를 사용하는 것을 막는 배타적 독점권을 행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러한 독점에 대한 비용을 공동체에 제공하여야 함을 역설한다. 이것이 토지지대세이며, 이 세금이 온전히 걷히면 여타의 자본과 노동에 부가되는 직간접세는 철폐될 수 있다는 사상이기에 이를 ‘지대단일세’라고도 이야기 한다.
헨리조지는 이러한 기본사상을 ‘정치경제학의 엄밀함’과 ‘정의적 평등성’에 입각해 모두다 증명해 간다. 그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진보와 빈곤’을 통해 그는 몇단계를 거치면서 ‘지대법칙, 임금법칙, 이자법칙’을 새로이 정립하면서 ‘사회의 진보가 지대의 꾸준한 상승으로 귀결됨을 논증’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가지 분배요소는 상호 관련되어 있기에 지대의 상승은 ‘임금과 이자’에 대한 압박으로 귀결되고, 이것이 토지소유자에게 생산물의 많은 부분이 귀속되고 노동자와 자본소유자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생존만을 보장할 뿐이라고 설명한다.

“헨리조지의 사상은 '자본의 사유와 토지의 공유' 를 바탕으로 한다. 즉 노력에 의해 생산한 것에 대해서는 생산자의 사유를 인정하여 효율성을 달성하고 사람의 노력과 무관하게 천부된 토지는 사유의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형평성을 달성하자는 것이다.”(김윤상의 글 참고)

지금에 있어서 헨리조지의 정치경제학은 약 7년여 동안 품어왔던 하나의 의문이 풀릴 수도 있는 좋은 계기를 주고 있다. 생산의 3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에 대해서 정당한 분배양식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대를 공동체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는 사상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헨리조지의 정치경제학은 또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지대의 왜곡을 통해 발생되는 ‘집값, 땅값, 상가임대료, 공장부지, 창고부지료, 높은 운송료 등’ 많은 부분에 대하여 해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해결 방향에 대하여 ‘정치경제학적 엄밀함’과 ‘도덕적 정의’를 통과하며 증명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적어도 나의 고민에 관한한 헨리조지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지대단일세 혹은 토지가치세를 실현하는 것은 땅값을 제로(0)로 만드는 일이다’라고. 나에게 있어서 토지문제에 관한 거대담론이 지금까지의 각론의 고민들과 조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그의 다음과 같은 언설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할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밝히려고 노력한 진리는 쉽사리 수용되지 않을 것이다. 수용이 쉬운 진리였다면 벌써 수용되었을 것이다. 수용이 쉬운 진리였다면 은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에도 지지자는 반드시 있다. 이 진리를 위해 수고하고 고통받고 심지어는 죽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리의 힘이다....
진리를 알고 따르려는 사람이나 정의를 인식하고 이를 위해 일어서려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성공은 거짓으로 이루기도 하고 부정으로 이루기도 한다. 진리와 정의는 본래의 권리로서 그 자신의 것인 그 무엇을 주지 않는다.
진리와 정의의 존귀함을 느껴본 사람이면, 진리와 정의가 지금 이 자리에서도 무언가를 준다는 사실을 안다.“(김윤상의 글 참고)


5. 이제 하나의 과제를 가지고 몇 개의 대안을 생각해 본다. 90년대 후반기를 지나면서 우리사회에는 ‘생명운동 혹은 생태운동’이라는 형태의 운동의 조류가 생겨났다. 귀농운동 혹은 생협운동 혹은 공동체운동 혹은 지역운동의 이름으로 곳곳에서 새로운 담론과 실천을 조직하는 흐름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들은 아직 사회화 되어 있지 않다. 아직까지는 개인 혹은 몇몇 집단의 담론형성과 모색의 단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의 대부분에는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존재한다. 농업과 농촌 그리고 인간과 자연간의 협력과 화해라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이미 이러한 운동은 비록 파편적이기는 하지만 꽤 두터운 대중적 흐름속에 기반하고 있다.
이 시기에 우리에게 토지에 대해 접점이 생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토지문제에 관한 한 너무도 뿌리깊은 토지사적소유에 관한 신화와 ‘강남불패’로 대변되는 부동산투기의 대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잘못된 신화를 넘어야 한다.
토지는 우리에게 있어서 사적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유물도 아니요, 투기의 대상도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토지는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며, 화합과 연대의 상징이다. 인간과 자연간의 새로운 화합과 연대의 매개체이며, 인간과 인간간의 새로운 화합과 연대의 상징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나고, 자라고, 죽어 돌아갈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이다.
토지문제에 접근하는 몇가지의 방법에 관하여 정리해보고자 한다.

“하나,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개인들의 생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토지헌납 혹은 토지대여를 통해 ‘예비귀농자 혹은 생명농업지킴이’들과 연결시키는 활동
둘,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한 각 단체별 농장갖기 활동 혹은 생협활동
셋, 좋은 의지를 가진 법인 그리고 종교기관, 개인들의 성금을 모아 ‘공공의 토지’를 넓혀가는 활동
넷, 지자체정부 혹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토지가치세(우리나라의 경우, 토지공개념 혹은 부동산 보유세 등으로 이미 사회적 쟁점이 형성되고 있다)를 확대해 가기 위한 활동“

이러한 활동 이외에도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활동이 각 지역과 부문의 특성에 맞게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적 문제와 실천적 어려움을 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켜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또한 이러한 활동의 결과는 매우 건강한 세상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관심과 애정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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