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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기농업을 해 보겠소, 그런데 그건 어떻게 팔 수 있을까요?’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17:11 6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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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생협 캠페인 1)

‘내가 유기농업을 해 보겠소, 그런데 그건 어떻게 팔 수 있을까요?’
이정호(인드라망생협 상무이사)


1. 1998년 3월 27일에 ‘제1차 불교귀농학교’라는 장을 열었다. 약 200여분이 문의하였다. 당일에는 60여분이 넘게 입제식에 참여하였다.
몇 번의 강의를 거치면서 숫자는 약 40분으로 줄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술자리에서 들은 그 분들의 평은 이랬다. ‘유기농업, 그거 좋은 것 같긴 한데 어디 사람이 할 짓이오. 도사들이나 할 짓이지. 나는 그거 못할 것 같소’ 뭐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약 30%에 달하는 분들이 이러한 말들과 심정으로 ‘불교귀농학교’를 떠났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약 30%에 달하는 사람들은 이랬다. ‘기계가 싫고, 경쟁이 싫고, 사람들이 싫다. 그래서 산속 깊은 곳에 가서 이놈의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겠다’ 귀농학교 초창기에 이런 분들이 꽤 많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분들을 ‘전투적 반문명론자’라고 부르곤 했다.
아마도 김흥수님이라고 기억된다(아닐수도 있다!). 귀농학교가 약 3분의 2 가량이 진행된 어느날 술자리에서의 일이다. ‘내가 유기농업을 해 보겠소, 그런데 나도 읍내라도 나갈라 치면 최소한의 돈이 필요할텐데.. 그럴러면 유기농산물을 팔아야 할 텐데.. 그거 어떻게 파는게 좋겠소’라는 취지의 것이었다.


2. 이러한 물음이 숙제로 다가왔다. 이것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생협중앙회’ 사무실이었다. 당시에는 영등포의 ‘신협중앙회’ 건물의 한켠에 세들어서 조용히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서 열심히 설명들었다. 그리고 꽤 많은 생협책자 및 자료집을 사 왔다.
‘불교귀농학교’를 준비하던 사람들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하여 학습하기 시작했다. 약 3달동안 1주일에 한번씩 당시 ‘생협운동’을 하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작은 사랑방공부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생협운동에 대한 감동이었다. 협동조합운동이 약 1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인류의 지적자산이라는 것이었다. 이 협동조합운동이 ‘유기농산물’이라는 인연을 만나 우리나라에서는 ‘생활협동조합’이라는 것으로 재탄생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이 생활협동조합운동을 열심히 하면 생협의 조합원들은 저절로 귀농을 하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점이었다. ‘이 시대에 유기농산물의 여러 가지 측면의 가치를 이렇게 열심히 설파하는 집단이 생협이니 진지한 조합원들이면 누구나 삶의 근원적 자리인 농업과 농촌으로 복귀할 수 있는 여지가 많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우리의 ‘귀농운동’과 ‘생협운동’은 만나야 하고, 한 쌍의 바퀴벌레가 되어야 온전한 운동이 될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3. 인드라망생협이라는 기관과 각 사찰의 유기농산물 매장 그리고 ‘친환경공양미운동’은 이러한 믿음과 희망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단지 꿈과 희망으로 생각하던 ‘생협과 귀농’의 결합이 과연 어느 정도에서 실현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믿음이 구체화 될 필요성이 있는 것이라면, 지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것의 구체화 과정에 동참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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