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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농사꾼의 김매기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22:32 6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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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농사꾼의 김매기
이병철(인드라망 지도위원,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사람들은 대개 내가 귀농했다고 하면 그 다음에 그러면 농사는 얼마나 짓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적잖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더구나 묻는 사람이 내가 귀농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때면 더욱 그렇다. 귀농을 한다고 하면 귀농의 목적이 으레 농사짓고 산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처럼 농촌에서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삶 그 자체가 좋아 사는 경우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마땅하지 않을 경우도 많다. 그럴 때 내 대답이 텃밭이나 가꾸며 지낸다거나 그냥 이웃사람들 농사짓는 것 구경이나 하며 지낸다고 답하곤 한다.

모를 내어 놓은 다음 무엇이 그리 바쁜지 계속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두어 번 스치듯 둘러본 뒤에 거의 논에 가보지 못하고 있다가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리에 한참 만에 논에 가보니 온 논바닥이 잡초로 덮여 있다. 이웃한 다른 논들은 풀 한포기 없이 말끔한데 내 논만 풀밭투성이다. 우렁이를 남들과 같이 넣어 두었는데 물 관리를 제대로 못한데다가 백로란 놈이 많이 주워 먹었는지 빈 우렁이 껍질이 수두룩하다.

다행이 논의 위치가 사람들 내왕이 드문 곳에 있어 지나는 사람들 눈길은 별로 의식하지 않을 수 있지만 심어 놓은 벼들한테 너무 미안하다. 거름 한번 제대로 주지 않고 농사는 하늘이 알아서 하시는 일이니 자연에 맡기면 된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겐 나는 자연농법을 한다고 강변하지만 속으론 자연에 맡긴다는 것과 그냥 방치하는 것이 다름을 알고 있다. 차마 스스로에게까지 억지를 부릴 수 없는 게 아닌가. 맡기는 것과 내버려둠의 차이는 한마디로 거기에 내 시선이, 내 마음이 함께 하고 있느냐 없느냐 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농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본다. 아이들을 기를 때도 아이들을 그 분께 믿고 맡기되 맡긴 그 자리에 내 시선도 그 분과 함께 거기에 가 있는 것 그것이 맡김의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벼포기 이랑사이에 무성하게 돋아나 있는 게 대부분 피들이다. 심거나 씨 뿌리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벼포기만하게 자라난 피의 생명력이 놀랍다. 이대로 두면 벼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피농사를 짓게 될 지경이다. 이렇게 논이 온통 피밭천지로 된 것은 지난해 피사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가 씨앗을 맺기 전에 뽑아내었어야 되는데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피가 다 익어 씨가 떨어질 즈음에야 남들 보기가 민망하여 피를 뽑는다고 뽑았는데 이게 오히려 피 씨앗을 온 논에 잘 퍼지게 해준 꼴이 되었다. 농사일에 있어서 왜 때를 놓쳐서는 안 되는가를 또다시 경험한 것이다. 게으른 농사꾼(?)에겐 이렇게 공부할 거리도 많은 셈이다.  전생을 알고 싶으면 이번 생의 모습을 잘 보라고 했는데 이런 피밭을 통해 지난해 내가 어떻게 농사지었는지가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하다. 이 말을 더 이어서 한다면, 이번 가을 수확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려면 지금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쯤 될 것이다. 날씨 등 자연재해 문제만 없다면 말이다.

우스갯말 가운데 직장 상사가 멍청하면서 부지런하면 아랫사람들이 힘들다는 데 그래서 멍청할 바엔 차라리 게으른 것이 남들을 위해 낫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말들이 나처럼 멍청하면서 게으른 사람들에겐 하나의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농사짓는 데 있어서만큼은 멍청하면 정말 부지런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말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아니 어쩌면 농사짓는 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사람은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보다 멍청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농사일이란 머리의 계산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산으로선 답을 찾을 수 없는 게 농사일이라 할 수 있다. 농사 그 자체, 생명을 돌보고 기르는 일 그 자체가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면 이 시대, 농사짓고 사는 일이란 또 하나의 천형일 수 있다. 계산을 통해 어느 누가 이처럼 버림받은 일을 선택하고자 하겠는가.

때문에 농사일이란 어떻게 하면 돈벌이가 되는가 하는 그 ‘계산’을 놓지 않는 한 모든 기준이 돈으로 평가되는 이 시대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돈벌이를 생각하면서 농사를 자연의 흐름에 맡길 수 없는 까닭이다.

남들은 한두 시간이면 충분할 손떼기 만한 논 한마지기를 한나절이나 걸러 김을 매면서 논이 컸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을 하고는 혼자 쓴 웃음을 짓는다. 아파오는 허리 때문에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남은 고랑이 얼마나 되냐 세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게으른 자 고랑만 센다는 말이 맞구나 싶어서다. 그러나 논에 김매기를 다 마치고 말끔해진 논을 바라보면 흐뭇하다. 벼들을 쳐다보기에도 한결 떳떳하다. 비로소 주인 노릇을 좀 했다는 생각이 든다.

농사를 땅에 의지하여 자연의 운행에 따르면서 생명을 기르는 일이라 한다면 그 농사의 요체는 ‘생명을 돌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돌보는 일, 돌보는 마음이 곧 농사요, 농심이라는 것이다. 이런 삶과 그 마음자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이라 싶다. 자연 생태계의 일원인 사람이라는 종(種)이 이른바 산업화, 도시화라는 것을 통해 잃어버린 이런 삶의 방식과 그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 다시 자연과 조화되는 삶을 사는 바탕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우리가 농촌으로 돌아가 흙과 함께 살아야 하는 까닭이라 할 수 있다. 오늘 게으른 농사꾼의 김매기를 통해 다시 얻는 생각이 이것이다. 그냥 생각이 아니라 몸을 통해 얻는 생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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