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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이와 생협이가 만났을 때...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22:33 67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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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이1)’와 ‘생협이2)’가 만났을 때...3)
이정호(인드라망생협 상무이사)


1. ‘귀농이’ 이야기
잠깐 귀농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현재 필자가 속해 있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세가지의귀농학교가 있다. ‘불교귀농학교’와 ‘실상사귀농학교’ 그리고 ‘현장귀농학교’가 그것이다.

불교귀농학교는 2개월간 서울에서 1주에 2회씩 귀농에 관한 이론과정을 진행한다. 실상사귀농학교는 9주간에 지리산에 있는 인드라망교육원에서 합숙형태로 실천프로그램이다. 그리고 현장귀농학교는 현재 전국의 12개 지역에 약 2-3명의 학생들이 ‘선배귀농자’들의 도움으로 1년동안 귀농정착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세 가지 형태의 귀농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약 1천여명의 예비귀농자들이 교육을 수료했다. 불교귀농학교가 약 800여명이며, 실상사귀농학교가 200여명이다. 현장귀농학교는 작년부터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귀농학교도 명색이 학교이니 취업률 혹은 진학률이 문제다. 불교귀농학교의 경우 2-3년 후 약 10% 정도만이 귀농을 한다. 그리고 실상사귀농학교의 경우는 50% 이상이 1년내에 귀농을 한다. 이를 대략적으로 합쳐보면 약 15%의 수료자만이 2-3년 이내에 귀농을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취업률로만 보면 그야말로 최악의 학교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이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뒤져서 귀농이라는 말로 카페를 찾아보면 그야말로 수십개의 카페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카페들은 몇 만명의 회원이 있는 곳을 비롯하여, 수천명의 회원이 있는 곳이 즐비하다.

뿐만아니다. 예전에 어느 예능프로그램에서 1주일간 30대가 가장 많이 조회한 단어를 조사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귀농’은 당당히 1등이었다. 10여년전에 이 땅에는 ‘귀농’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사회에는 ‘귀농’이라는 말을 모르는 이가 별로 없다. 쉽게 말해서 그야말로 ‘귀농’이라는 단어가 조용한 열풍을 몰고 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현상을 단순비교 하자면, 그야말로 ‘말만 많다!’라고 할 수 있겠다. ‘말로만 귀농’이고 ‘몸은 도시생활’이다. 지난 10년간 귀농학교를 진행하며, 귀농운동의 한 켠에 빌붙어 있던 한사람으로서 이 현상에 대하여 이유를 찾아야 했다.

지금 그것에 대하여 중간점검을 해 본다면, 우리사회가 그리고 우리농촌사회가 ‘예비귀농자’들에게 결코 녹녹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2004년 쌀개방논쟁과 2007년의 한미FTA논쟁을 통해 우리사회는 ‘농업개방 불가피, 핸드폰 팔아 쌀 사먹는다’라는 것으로 농업과 농촌을 정리했다. 더욱 어려운 것은 우리의 농촌현실이 ‘외부도시인’이나 ‘고향으로 돌아온 도시인’에 대하여 결코 따뜻한 시선을 가질 여유가 없다. ‘예비귀농자’들에게 있어 이 객관적 현실은 가혹하다.

그리고 ‘예비귀농자’들의 가족들이 전면적으로 아빠나 엄마 혹은 부모님들의 선택과 결정에 전폭적인 환호로 대하지 않는 것도 또 하나의 부담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귀농은 ‘독립운동’의 심정으로 그리고 우국지사의 자세로 준비해야 할 문제이다. 

대개 불교귀농학교에 오는 분들은 ‘귀농’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한번 정리해 보자는 목적을 갖는다. 그리고 대략 ‘2-3년의 준비기간을 거쳐서 귀농을 해야지!’라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 기간동안 내외적인 어려움을 딛고 귀농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초보귀농자’의 귀농정착은 괜챦을까? 아니다. 이제부터 이 초보귀농자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 농사짓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적어도 2-3년간의 시간을 보내야 ‘초보귀농자’의 땅은 소위 ‘친환경 표딱지’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친환경농산물을 생산하고, 그것을 판매하자면 ‘생협’이나 ‘백화점’ 혹은 ‘프렌차이즈’등에 납품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경쟁에 뛰어들자면 적어도 ‘친환경표딱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발탁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 자격이 생겨나는 것이다. 고달프다. 적어도 4-6년동안 일해야 겨우 자본주의 경재시장에 뛰어들 자격증이 주어진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귀농할 마음이 딱 떨어진다. 그래서 취업률이 15%를 넘지 못한다. 이것이 현장귀농학교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도시지역에서의 귀농학교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10년간은 농촌 지역에서 귀농학교를 열어서 각 지역에서 ‘예비귀농자’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일이 중요할 것 같다. 적어도 각 군에 하나의 귀농학교를 열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2. ‘생협이’ 이야기
생협운동의 초창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 생협운동의 흐름은 몇몇 사회, 시민, 종교단체들의 ‘농산물직거래사업’으로 시작되었다. 이때가 대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이었다.

농산물직거래사업의 특성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생산자들의 생산물에 제한되어 거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생산자들이 소비자들을 직접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생산자’의 신뢰에 입각한 교류라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생산물이 제한적’이라는 곤란함을 가진다.

농산물직거래사업이 활성화 되면서 각 단체의 회원들의 요구는 생산물의 다양함과 생산물의 일상적 공급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에 조응하기 위한 변화가 ‘안전한 농산물’과 ‘생활협동조합’ 방식의 결합으로 나타났다.

2,000년 생협법의 제정으로 이 흐름은 급격하게 합법화 되었다. 전국의 많은 곳에서 생협법에 근거한 생협법인이 생겨났다. 이러한 주체적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친환경농산물’이 합법화 되는 계기가 결합되면서 생협의 생산물들은 점차 ‘합법적으로 검증된 생산물’에 대한 요구로 안정화 되었다.

합법화된 생협에서 합법적으로 인증된 농산물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진화의 과정이었다. 단지 이 과정에서 분명하게 짚어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예전에는 ‘생협운동의 주체들’이 진행하던 ‘신뢰성’의 문제를 국가기관이나 특별한 검증기관에서 대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생협운동과 유기농산물의 합법화 과정에서 ‘생협운동계’는 다양한 농산물에 대한 욕구를 채우는 대신에 신뢰성의 문제를 넘겨주는 것을 비용으로 지불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 대부분의 생협에서 농산물 선택의 기준을 ‘인증여부’에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조건속에서 ‘귀농이’들의 입장을 보겠다. 예비귀농자들은 약 2-3년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귀농을 단행한다. 그리고 이들은 약 3-4년간의 노력을 통해 ‘유기농산물’ 인증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내 우리들 생협운동가들과 만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현실속에서 이러한 일들을 잘 벌어지지 못한다.

첫째 이유가 예비귀농자들의 준비과정이 지금까지 ‘개별적 귀농’의 형태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데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예비귀농자들이 몇몇 특별한 지역(홍성인근, 괴산인근, 실상사인근, 팔당인근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흩어지는 귀농’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이것은 ‘생태적, 공동체적 귀농’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통해 예비귀농자들이 ‘현장귀농학교류’의 새로운 운동으로 스스로 풀어가야 할 부분이다.

두 번째 이유는 초기 귀농정착기인 3-4년간의 기간동안 그들에게 손잡아줄 친구들이 없기에 그러하다.

이 땅에서 ‘지속적인 유기농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유기농업의 한축인 ‘유기농생산자’들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농업과 농촌은 자신의 후손들을 재생산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밖에서 농촌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초보귀농자들은 농업에 관한 한 ‘어린애’들이다.

이들은 초창기 3-4년이 너무 어렵다. ‘친환경인증’을 따기 위한 3-4년간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놓여지는 것이다. 누가 이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 것인가?


3. ‘귀농이’와 ‘생협이’가 만나게 된다면...
필자는 ‘귀농운동과 생협운동의 만남’이라는 화두로 1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귀농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생협운동 1세대’들의 많은 글들을 보았다. 그

것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생협운동이 ‘농촌과 농업’ 그리고 ‘생명사상’과 강하게 결합되어 생겨난 것이구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생협운동과 귀농운동이 강하게 결합되어야 양쪽이 건강하게 발전해 갈 수 있겠구나!라는 것이었다.

약 10년전 그때의 심정을 표현해 본다면, ‘유기농업을 도시속에서 함께 실천하는 조합원들은 10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귀농하겠구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 느낌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구나’로 정리하고 있다.

지금도 ‘귀농학교’에 오는 분들중에 많은 분들이 생협의 조합원이라는 것에서 반은 맞는 느낌이고, 대부분의 ‘생협조합원’들은 ‘귀농’이라는 것이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내 생각의 반은 틀렸다고 본다.

현재 필자는 지난 10년동안 개인적으로 생각으로만 ‘귀농운동과 생협운동의 결합’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화두에 대한 ‘지극정성의 실천’이 결합되지 않으면 이 흐름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것이 갖추어졌을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실천을 모아 갈 때 화두가 현실이 된다고 믿게 되었다.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을 찾아보고, 이를 위해 노력해 볼 것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첫째, 생협의 각 매장에 ‘귀농자코너’를 운영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많은 귀농자들이 자신의 농산물을 잘 생산하고 있지도 못하다. 그래도 찾아보면 전국의 여러 귀농학교를 통해 배출된 귀농자들이 많이 있다. 이들과 잘 연계를 맺어 간다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가능한 생협에서는 자신의 조합원중에서 이러한 ‘초보귀농자 혹은 예지귀농자’들의 모임을 정기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도 가능한 사업이 아닐까 싶다.

의외로 예전의 생협조합원들중에 귀농자들이 많다. 이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귀농을 꿈꾸는 분들이 많다.

세 번째로는 생협이나 생협매장들이 속해 있는 마을에서 공공지를 활용한 ‘친환경장터에 귀농자들을 초대’하는 자리를 마련해 보는 것도 생각해 봄직하다.

귀농자들의 경우 다른 농부들이 그렇겠지만 6-7월중에 한번 농산물이 한번 나오고, 대개 10-11월중에 대부분의 농산물이 나오게 된다. 이 시기에 초보귀농자들의 농산물을 조합원들이나 인근 지역주민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선은 이 세가지 사업만이라도 시작해 볼 수 있는 생협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귀농운동과 생협운동의 만남’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냥 약간 고개만 돌려 약간의 배려만 하면 ‘지금여기’에서 실현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사업은 우리가 하는 생협운동이 ‘새로운 대안문명운동’으로 꾸준히 나아가는데 큰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대안문명이 농업과 농촌의 가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를 향한 운동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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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에서도 ‘귀농운동과 생협운동’이 각기 10여년과 20여년의 세월을 가졌다. 이 글은 이 두 가지 흐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필자의 생각을 대략 정리하려고 쓰여졌다. 귀농자들의 현실에 대하여 돌아보고, 생협운동의 현실도 돌아보면서 이 두 흐름의 접점을 한번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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