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 걱정을 할 것인가? 성찰할 것인가? > 마을공동체

본문 바로가기

인드라망 아카이브

먹을거리! 걱정을 할 것인가? 성찰할 것인가?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22:42 659 0

본문

먹을거리! 걱정을 할 것인가? 성찰할 것인가?
이정호(인드라망 운영위원, 불교생협연합회 운영위원장)


1. 걱정이 많다.
* 요즘 먹을거리와 관련된 걱정이 많다. 옛날에는 먹을거리에 대한 걱정은 ‘없어서!’였다. 끼니가 걱정되는 것은 그것이 없어서, 그래서 배고파서 문제였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먹을거리가 꽤 많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절대량이 모자라는 시대는 지난 것으로 알고 있다.

* 요즘의 걱정은 먹을거리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요즘 세간의 큰 이슈인 ‘광우병’은 코앞에 닥쳤다. 아직까지 우리국민에게는 생소한 ‘유전자조작농산물( GMO)이 공식적으로 수입되고 있다. 그리고 이미 먹을거리에 대한 걱정의 ’고전‘이 되어버린 ’농약과 비료‘로 범벅이 된 음식들은 여전히 우리의 식탁을 지배하고 있다.

* 우리 불자들의 언어로 보자면, ‘이 음식에 깃든 모든 이의 공덕을 생각하며....’라는 공양게가 ‘이 음식에 혹시 나쁜 것이 찜찜...’하는 것으로 바뀌는 걱정이 커졌다. 지난 20여년동안 우리사회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위험한 미래’에 대하여 꾸준히 경고해 온 사람들이 있었다.

* 우리사회의 급속한 근대화가 ‘환경오염’이고, ‘생태계파괴’이며, ‘이상기온’이라는 또 하나의 사실을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우리사회가 ‘편리함’을 얻는 대신에 지불해야 할 댓가로 ‘불편한 진실’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제 그 ‘불안한 미래’가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이다.

* 먹을거리에 대한 불자들의 생각은 ‘인연되는 음식, 고맙게 먹자!’라는 것이 원칙적으로 맞다고 본다. 그것이 ‘발우’를 들고 일곱집을 돌아서 인연되는 음식을 고맙게 받았던 초기 불타의 정신에 맞는 방법일 것이다.

* 그런데 연일 계속되는 음식물에 대한 걱정이 크다. 우리 불자들도 이러한 세간의 걱정에 대하여 자유롭지 않다. 불자로서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2. 먹을거리가 왜 위험에 처했을까?
* 불자들은 하나의 현상에 대하여 반드시 그것의 원인에 대하여 묻는 방법론을 배웠다. 그것이 ‘성찰의 자세’를 강조한 부처님의 방법론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세간의 문제가 되고 있는 먹을거리가 왜 걱정거리로 되었는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몇 가지 살펴보자.

* 첫째, 근대화를 통한 ‘편리함’의 댓가로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우리사회가 먹을거리에 대하여 ‘없어서 못먹는 것’에서 ‘위험하다!’라는 인식으로 전환된 시기는 대략 90년대이다. 이 시기에 전 세계는 ‘리우환경선언’을 채택하면서 각국의 ‘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에 대한 공개적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환경운동, 혹은 반공해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선언이 시작되었다. 우리사회가 근대화, 도시화를 이룬 다른쪽에는 ‘문명의 어두운 면’이 함께 존재한다는 선언이었다. 우리사회는 이 시기를 통해 서서히 ‘환경오염’이 식탁오염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먹을거리가 ‘없어서 걱정’이 아닌 ‘식품안전’이라는 새로운 화두가 제기되었다.

* 둘째, 우리나라 농업과 농촌에 대해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면서 생겨난 문제였다.

우리사회는 지난 50여년간 ‘공업화, 도시화’를 최대의 과제로 여겨왔다. 그래서 도시로 그리고 공자주변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대신에 농업과 농촌지역은 대규모의 인구감소와 ‘사회적 천대’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업제품에 필요한 ‘기술’만을 진정한 ‘기술’로 여겼다. 그러나 오천년을 이어온 ‘자연과의 조화’에 바탕한 ‘생태적 기술’인 농업은 ‘진정한 기술’로 여기지 않았다. 공장에서 사람들을 조직하는 기술만을 ‘경영학’으로 여겼지, 수천년동안 ‘우리의 산하’와 ‘사람들의 삶’을 지켜왔던 ‘마을공동체’와 ‘지역순환성’에 대하여는 그 과학성을 인정치 않았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보더라도 현대과학기술과 공업화의 위력은 기껏 50년의 기간동안 우리사회를 지켜왔지만, 농업이라는 ‘생태적 기술’과 ‘농업공동체과 마을공동체’는 5,000년의 세월동안 우리를 지켜주었다.

잠시동안의 경제적 이익을 안겨준다고, ‘반도체’와 ‘조선공업’ 그리고 ‘엘시디텔레비젼’을 살려내고 우리민족의 5,000년 삶의 기반을 내어주는 ‘국가발전전략’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면 결코 우리의 밥상은 걱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 셋째, 도시인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농업인들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근의 먹을거리와 관련된 모든 논의에는 소위 ‘소비자잉여’라는 논리가 있다. 이것은 쉽게 보자면 농민들에게는 조금 불리하더라도 ‘도시인들은 이익’이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광우병’소도 농민들에게는 조금 위험하지만 ‘도시인들’은 싼 소고기를 먹을 수 있기에 괜챦다는 논리이다.

우리의 곡물자급량은 현재도 25%이다. 하루의 세끼중의 2끼니와 반 가량은 외국의 농산물에 의존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더 나아가 지속적으로 농정을 개방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단기적으로 우리나라의 도시 소비자들은 싼값의 농산물을 먹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우리사회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지금도 국제시장에서 농산물 가격은 폭등하고 있다. 우리의 농사기반이 없어지고 난후 우리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전세계에 구걸해야 할 판이다. 광우병 소를 ‘어쩔 수 없이!’ 개방해야하는 현재의 논리가 모든 농산물에 대하여 사용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더욱더 열악한 상황의 먹을거리라도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들여와야 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3. 생명평화의 가치와 생명의 안전
* 전세계적으로 먹을거리와 관련된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광우병소는 지난 10여년전부터 이미 유럽사회 전역을 떨게 만들었다. 조류인플루엔자에 의한 공포는 이미 토착화 되었다. 전세계적인 쌀폭등 현상은 이미 일반화 되었고, 곡물시장에는 투기펀드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다.

* 1996년 스위스 사람들은 ‘국민투표’를 하였다. 그것의 이슈는 ‘밥상의 고기와 곡물을 스위스에서 난 것들을 먹을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스위스 국민들은 ‘그러자!’는 선택을 하였다. 그리고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위원회’를 꾸려서 이 국민들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실천계획을 광범위하게 논의하였다.

* 스위스의 이러한 노력은 스위스 정부로 하여금 10년 계획을 내놓게 하였다. 그리고 1999년 이래 스위스 국민들은 안전한 자국의 곡물과 고기를 통해 자국민들의 밥상을 지키는 프로그램을 9년째 추진하고 있다. 그것도 친환경농산물에 의해서 그렇게 한다.

* 스위스 뿐만 아니라, 현재 유럽의 여러나라들은 이미 10여년전부터 자국 농산물의 보호와 자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유기농업으로의 전환’이라는 가치를 통해 자국 농산물을 ‘친환경농업’을 중심으로 한 농업체계로 바꾸어 가고 있다.

* 이러한 유럽사회의 움직임과 우리사회의 움직임을 비교해 보자. 너무나도 판이하지 않는가? 그들은 ‘생명의 안전’을 최우선의 가치로 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공업제품 판매’를 위한 ‘농업과 생명안전의 희생’을 국가 과제로 삼고 있다.

* 인류가 근대화를 넘어서면서 이제 점차로 한 국가의 최고의 덕목이 바뀌어 가고 있다. 생명의 안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로 전환하는 것이 선진국의 덕목이지 않을까 싶다.


4. 생명의 안전과 성찰의 필요성
*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우리사회에는 충격이다. 지금까지 우리사회가 ‘돈과 물질’ 중심의 가치로 빠르게 달려왔기에 그러하다. 열심히 달려온 결과가 ‘밥상의 불안’과 ‘생명에 대한 위협’이라는 현실에 대하여 기가 막히다. 그것도 우리세대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대를 이어서 지속적인 ‘위험사회’를 상상하니 더욱 불안하다.

* 지금 벌어지고 있는 먹을거리와 관련된 각종의 걱정거리는 경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대사회의 편리함을 댓가로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가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이제 ‘편리함’의 댓가로 ‘생명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사회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경고인 것이다.

* 현대사회는 편리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자동차의 편리함을 예찬하고 있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의 편리함을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대형마트의 진열대의 편리함에 대하여 그리고 아파트의 편리함에 대하여 우리의 고개를 끄덕여지고 있다.

* 그러나 조금더 비틀어 생각해 보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의 편리함이 현대인들에게 '극도의 운동부족‘을 낳고 있다. 자동차의 편리함은 세계최대의 교통사고 사망률을 선사했으며, 아파트의 편리함은 아이들의 아토피와 각종의 현대질병을 초래한 원인이 되고 있다.

* 우리는 지금껏 빠른 사회변화를 찬탄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멈추어서서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성찰해 봐야 할 때이다. 성찰해야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편리한 현대사회의 문명의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하기에 그렇다.

* 이제 우리는 생명의 안전에 대하여 유심히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10여년의 시간을 현대사회와 현대문명에 대하여 유심히 성찰할 것을 주장해 왔다.

그래서 ‘귀농학교’를 꾸준히 펼쳐왔으며,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농촌지역공동체’의 재구성에 대하여 노력을 기울여 왔다. 나아가 봉은사, 능인선원, 수원포교당, 화계사, 불광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에 ‘친환경유기농산물매장’과 ‘친환경공양미’운동을 제안하며 함께 시행하고 있다.

아직까지 불교계에 전반적으로 확산되거나,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사회는 현대문명이 배태한 또다른 측면에 대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 경고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모색하는 흐름이 꼭 필요하다. 불교계에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길에 나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합장.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적용하기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