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귀농학교의 일년을 돌아보면서.... > 마을공동체

본문 바로가기

인드라망 아카이브

불교귀농학교의 일년을 돌아보면서....

인드라망사무처
2022-11-08 15:54 618 0

본문

이 글은 지난 98년 11월 초순에 쓰여진 글이며, 부산불교 자비원에서 발행하는 '큰수레'라는 잡지에 실려있는 글입니다.
앞의 글과 다소 중복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귀농학교'의 문제의식과 활동경과 등을 정리해 놓은 것이라, 관심있는 분이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올립니다.


불교귀농학교의 일년을 돌아보면서....
이정호(생협이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처장)


1. 봄 꽃이 초겨울에 피다

한동안 가을의 상징인 코스모스가 초여름에 그  꽃을 함박피워 보는 이로 하여금 의구심을 자아냈었다. 그리고 오늘은 9시뉴스에서  봄에 피는 진달래와 철쭉이 초겨울에 피워 큰 화재거리로 보도되었다.
이른봄 잎이 채 돋기도 전에 미리 피어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성급함을 위로해 주던 그 꽃이 초겨울에 핀 것은 분명  드문일이고, 자연의 이치에 걸맞지 않은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을 보는 우리들의  해석에서 생겨난다.
뉴스를 전달하던 기자의 끝마디는  '… 이러한 것이 엘리뇨와  라니냐에 의한 지구 기상이변의  영향이기에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임이 틀림없다.…'라고 맺고 있다. 예로부터 으레  그래왔던 것 그리고 특이한  어떤 것을 보는 시각은 대개  두가지다. 길함을 상징하던지 흉함을  상징하던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따라 대응방식을 염두에 두곤 했다.
초겨울에 핀 봄꽃을 보는 우리의 감성은 기자가 상상하는 것과 그리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분명 봄꽃을 초겨울에 보는 우리의  심정은 겨울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연분홍의 진달래에서 느끼던 그것이 아니다.
일상생활과 혹은 다양한 간접경험을 통해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많은 사건과 현상들이 우리의 감성지수를 그렇게 질서지우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다소 비약과 오류의 위험은  있으나, 우리들의 감성은 '생명의 위기'라는 낱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봄꽃을 초겨울에, 비닐하우스도 아닌 한지에서 보았던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이렇게 상상해 보는 것은 너무 우울한 상상력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작년부터 유난히 화재가 되었던 엘리뇨에 의한 전세계의 기상이변을 보았고, 올여름 중국의  인민해방군의 인해전술로 양쯔강의 범람과 싸우던 모습도 지켜봤다. 더구나 좀더  세심한 사람이었다면, 초여름의 길목에서 길가에 하늘거리던 코스모스의  물결도 지켜보았을 것이고, 늦가을 누런 가을들녘과 어울림직한  푸르른 가을하늘을 대신한 거대한 먹장구름을 보았다.
그리고 98년 끝자락을 장식하고 있는 누런  진달래 잎에 붙어있는 연분홍을 진달래꽃을 보는  우리의 심정이 그리  달갑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2. 자연, 식량(에너지) 그리고 인류

자연의 변화와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가지는  방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 장기적으로도 그렇고 단기적으로  피해가 없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속의 일부분으로 존재할 때  인간이 가지는 특성이 의미가 있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자연변화의 방향과 속도가 결코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있어 긍정적으로 비쳐지지는 않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피해를 줄  가능성은 식량과 에너지문제에 있다.
식량문제의 경우, 이미 전세계의 식량시장은 인류를  먹여살리기에 충분하지 못한 절대생산량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몇 년전만  하더라도 세계최대의 식량수출국이었던 중국이 이제는 수입국으로 바뀌고  있으며, 동남아의 여러국가들과 아메리카 지역의 광대한  식량생산지대도 점차 생산량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녹색평론 재인용). 이외에도 여러 가지 상황의 결과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1억 이상의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으며, 인류의 거의 3분의 1인 15억명이 매일밤 허기진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고 있는  현실(제레미 리프킨<엔트로피>에서 재인용)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지속되는  기상이변이 구체적으로  식량사정을 더욱더 위협하는 홍수나 가뭄 그리고 냉해 등으로 나타나고, 그러한 기상이변이 인간이 행한 무분별한 욕구충족을 위한 생활(생산-유통-분배-소비의 전영역)양식에 깊은 관계가 있다고 했을때, 자연의 변화에 대한 인간의 행위가 직접적으로 인간의 장기적인 손해로 돌아오는 형국이 된 것이다.
에너지 문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에너지 문제에 관한한 결핍의 가능성에 대한 것은 너무나도 자주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현실속에서 그것은 다른 세계의 것으로 받아 들여지곤 했다. 그러나 점점 비싸지는 에너지 가격의 문제는  현실의 생활을 압박하기에 충분하다.  나아가 현재 에너지의 원천인 화석원료를 사용하고 남는 공해와 폐기물의 문제는 우리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무서운 것이 되고 있다. 이렇듯 에너지 문제는 그것의 결핍가능성과 비싸지는 가격, 그리고 공해와 폐기물의 문제를 포함한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식량과 에너지 문제가 가지는  또 하나의 커다란 문제는 태양과 흙과 대기중의 공기를 통해 지탱되어진다고 믿어왔던 식량의 문제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점점더 현대 농업, 어업 등에서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대단위 비닐하우스와 매년 엄청나게 뿌려지는 화학비료, 농약 등은 이제 농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제는 아예 인간의 힘으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농업방식이 앞서가는 방법인양 선전되고 있다.
한겨울에도 딸기를 먹어야겠다는 우리들의 욕심이  제철이 아닌 딸기를 생산하는 것을 방치하고 있으며, 혹은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를 일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주 원인은 자기행위에 대한  총체성을 생각지 않는 우리들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전도된 세계관과 그에 입각한 생활방식을 고쳐나가는 힘은 다시금 우리들의 윤리적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축적된 태양에너지인 화석연료가 이제 머리위에  이글거리는 빛나는 태양과 푸른초원 그리고 시원한 공기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화석연료는 한계점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뿌려지는 농약과 비료에 대지가 죽어가고 있으며, 공장의 검은 연기에 대기는 시들어가고 있으며, 도시의 두꺼운 공해층에 태양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더욱더 애석하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천년을 내려오던 농경문화의 담지자인 농부들이 속절없이 은퇴의 벼랑에 몰리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땅과 태양과 물과  인간이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식량을 위한 대합창의 기술이 점점 더 사라질 위기(혹은 독점화 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애석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지구촌 어느 한곳에서만 벌어지는 특이한 것이 아닌 대부분의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속에서 생겨나는 각  나라마다의 차별적 진행은  핵과 재래식 무기를 대체하는 식량게임(식량을 무기로하여 벌어지는  나라마다 혹은 지역마다의 갈등)의 문제를 또하나 던져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3. 귀농운동과 불교귀농학교

귀농운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귀농은 자신의 삶을 바꾸는 매개로서의 귀농을 의미한다.
자신의 삶을 바꾼다 함은 세상을 보는 자신의 눈을 바꾸고, 세상을 사는 자신의 버르장머리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먹거리와 그것을 다루는 일을 가장 천하게 여겨온 것이 지금까지의 우리의 눈이다. 얼마나 전도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 왔는가?  세상사람들이 모두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옳지 않는 것이라면 옳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이 아니던가?
우리는 혹시 자신이 될 수 있는한 자연과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좋은 것으로 여겨온 것이 아닌지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농촌보다는 도시가, 농업보다는 공업이, 공업보다는 서비스 업종이 좀더 편하고 좀더 윤택하다는 생각속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이러한 버르장머리가 만들어놓은 현재의 상황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자신이 한발 비껴서고자  한다면 이러한 현실의  삶을 우리나라의 역대 위정자들과 소위 '있는 사람들'의 탓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그 과정에서 그들의 버르장머리를 용인 혹은 추종해 왔으며, 이제  지금 우리는 그들의 버르장머리로 인해 생겨난 모든 생활도구와 생활방식, 그리고 생활가치를 공유하고 있지 않는가?
수세식으로 개량된 변소의 꼭지를 선택의 여지가 없이 내려버린다. 조금 찜찜하기는 하지만 어쩔수 없다. 굉장히 오른 석유나 가스의  값을 치루면서도 난방은 해야 한다. 조금 억울하기는 하지만 어쩔수 없다. 쓸데없이 켜진 집안의 전등을  열심히 꺼본다. 그것도  이제는 지쳤다. 그래도 텔레비젼에서 열심히 끄라고 선전하니 오늘도 열심히 꺼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뭔가 새로운 선택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건넌방에서 피곤한 몸을 뉘우고 계신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의 40여년간의 '이농'의 물결이 만들어낸 현재의  삶의 버르장머리를 바꾸지 않는다면,  어떤 희망을 볼 수 있겠는가? 이제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닌 바로 우리들이지 않겠는가?
여러 가지 물음표를 가지고 지난 올 한해를 보냈다. 그리고 현재 불교귀농학교 기초이론과정을 2기까지 진행했고, 약 100분의  동문이 배출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이론중심의 강의를 보강하기 위해 '지리산실상사'에 '전국귀농운동본부'와 함께 '실상사  장기귀농학교'를 3개월 과정으로 지난 9월 1일 개설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불교귀농학교 상설교육농장'을 송추에다가 꾸릴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더불어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지리산실상사'에 장기귀농학교 학사를 이용하여 이미 귀농한 분들을 중심으로 한 전문강좌를 전국귀농운동본부와 공동으로 꾸려보는 것도 기획하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불교귀농학교'의 교육프로그램의 외형적  틀은 '기초이론교육-장기귀농교육-상설교육-귀농자 재교육' 등으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귀농학교에서 예비귀농인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네가지이다.
첫째, 귀농을 하여 농약과  비료에 의존하는 농법이 아닌  '유기농' 혹은 '생태농업'을 지향해 달라는 것이다.
둘째, 귀농을 함에 있어 생태농법을 택함은 큰 '노동집약적' 방식을 택하는 것이기에 개별가구가 아닌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귀농을 추구해 달라는 것이다. 나아가 귀농을 통한 공동체의 구성을  통해 도시인들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귀농을 택한다 함은 빈약한 도시생활을 포기하고 풍부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농촌의 문화, 교육 등 생활전반에 대한 풍부한 대책과 대안을 함께 모색하여 새로운 마을문화와  마을생활을 회복하는 생활운동의 일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귀농을 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소비자들을 톤튼히 꾸려내야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튼튼한 귀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생산의 과정에서나 유통의 과정에서나, 소비의 과정에서 소비자가 튼튼하게  함께하지 않는다면 굉장히 어려운 여건이기에 그러하다. 우리가 귀농을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귀농운동'으로  전개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불교귀농학교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건 이제 막  농업과 농촌의 문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생태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 빈약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다 바람직한 식견과 보다 풍요로운 삶(물질적 풍요가 아닌)을 함께 추구해 나갈 작정이다.
귀농은 직업을 바꾸는 것에서  머물러서는 성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귀농은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물음이 필요한 일이기에 그러하다. 귀농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설계되어서는  성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귀농은 돈이 최고라고 여기는 우리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나가는 일이기에 그러하다.
귀농은 생활과 삶을 바꾸는 것이다. 나의 삶을 가치와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기에 귀농은 생활'운동'인 것이다.  나의 삶의 가치와 삶의 방식은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함께 바꾸어 가지 않으면 결코 바꿀 수 없는  한낱 꿈이기에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운동가'가 되어야 한다.
이제 불교귀농학교는 불교계의 여러분들에게 이 길을  함께 갈 것을 완곡히 촉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불자들이 먼저 나서서 함께 길을 내어야 할 ㄸ라고 본다. 이미 몇사람의 발길에 의해 그어진 오솔길은 뒷 사람들이 보다 용이하게 그 길을 갈 수 있게 할 수 있다. 이제 이글을 읽는  모든 불자들이 이러한 심정으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도록 부처님전에 기도해 본다. (98년 11월)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적용하기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