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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14호] 산골사는즐거움 - 안개에 휩싸인 산골가을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7 23:20 70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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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휩싸인 산골가을

양란영 (인드라망회원, 귀농자)  



안개가 자욱하다 매일 안개 속에 휘감겨 산다. 올해 들어 유난한다. 안개를 헤치고 밭으로 간다. 요즘 할 일이 가꾸는 일보다 거두는 일이 많아 힘쓰는 일이 제법 된다. 들깨는 식전에 해야 한다. 아침해가 올라오면 바삭바삭 마르기 때문에 낫질을 못 한다. 그거 알고 있어야 한다. 들깨던 참깨던 메일이건 콩이던. 밤이슬에 촉축히 젖어있는 새벽부터 아침 해 올라오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는 걸. 오늘 다 못 하면 내일 하더라도. 왜인지는 두 말 말고 한번 해보면 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 아니라 백견이 불여일행!이니라.


밭고랑마다 들깨를 베어 눕혀 놓고 마르길 기다린다. 고랑 사이사이 빈자리마다 심어 둔 무 배추들에 물을 준다. 가을가뭄이 이리도 길어질 줄을 몰랐단 말이다. 긴 호스를 소마구에 있는 수도에 연결해 밭에 까지 끌어왔다. 비탈밭이라 수압이 약해도 어쩔 수 없다. 아쉬운대로 줄 수 있으니까. 땅이 마를대로 마랐다. 딱딱하다. 이래서 무 배추같은 푸성귀들은 물 가까운 곳에 심어야 한단다. 가뭄에 물도 못 얻어먹고 싸그리 땅에 붙어 있는 꼴을 안 보려면. 우리뿐 아니라 산골마실 사람들 시간 날 때마다 경운기에 물통 싣고 나가서 무 배추밭에 물주느라 난리다. 고랑에 비닐을 씌운 사람들은 비닐을 째가며 주느라고 더 야단이다. 그래도 양껏 물을 얻어먹지 못한 배추들은 들쑥날쑥 키가 고르지가 못하다. 동네 우물 근처에 배추를 심은 구이장네는 그 우물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단다. 옛날 이 산골마실 공동우물이었는데 집집마다 지하수를 판 뒤로는 찾는 이가 없었는데, 그 우물에 모터를 연결해서 가까운 무 배추밭에 주고 있단다.


한나절 일한 다음 밭둑에 퍼질러 앉아 감 하나 따 먹는다. 감나무 밑에 떨어진 감들은 닭들한테 던져준다. 묵은 논둑에 억새꽃이 하늘거린다. 일손이 제법 있는 논과 없는 논하고 구분하라면 논둑을 먼저 보면 된다. 억새가 있는지 없는지. 점점 일손이 부족해 묵어자빠진 논과 밭들이 늘어난다. 첨에는 바랭이가 그 다음에 망초가 그 다음엔 쑥대궁들이 그 다음엔 억새가 차례차례 차지해 들어온다. 그 다음엔? 잡목들이 우거지게 되지. 그리곤 평범한 야산으로 돌아가버린다. 절로절로 저절로 자연스럽게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그리 되어버린다. 인간들이 억지로 손을 대지 않는 이상.


새참으로 고구마를 찐다. 산 밑 자락에 있는 옹달샘에 가서 물 한 대접 떠와서 한 때를 때운다. 일을 하지 해 놓고 끼니 때우겠다고 이것저것 마련하자면 일할 시간 다 허비해서 안 좋다. 이렇게 해가 자꾸 짧아지고 때를 맞춰 일을 해야 하는 밭일에는 아주 간단하게 허기를 때울 수 있는 고구마 같은 것이면 새참으론 아주 좋다. 요새 호박고구마가 맛이 좋더라고. 생긴건 진짜로 호박같이 생겼는데 맛은 기맥히더라고. 그래서 겉불속이라 했나. 해서 요새 참거리가 애매할 때 요긴하게 챙겨먹고 있다. 얼라들은 찐 고구마보다 아궁이 숯불에 군고구마를 더 좋아라 해서 그넘들은 아궁이 옆에 붙어산다. 며칠 전에 밤 주워온 걸 죄다 궈 먹더니만 급기야 이웃집 얼라를 부추켜 그 집 밤까정 다 궈먹었더라. 좋을때다.


들에 산에 노란 산국이 한창이다. 조그마한 꽃송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참 귀여운데 이넘이 차를 맹글어 먹어도 좋고 베겟속에 넣어도 그 향이 좋다하대. 오래된 돌담가에 피어있는 모습을 보면 안 반하곤 못 배기리. 논일 밭일 얼추 끝내놓고 딸내미 손잡고 산으로 들로 산국 따러 갈란다. 작은 소쿠리에 가득 따와서 들마루에 말려야지. 참 희한치. 들마루에 무언가를 말리고 있으면 그저 암 소리 안 해도 가을 같더라고. 하다못해 호박이라도 썰어 말려야 맘이 놓이는 걸. 이 가을 다 가기 전에 이것저것 말려봐야지.


가을 햇살 따갑다 뭐라 그러지 마라. 금방 지난간다. 날 추워서 오종종 거리며 팔장끼고 다닐 때가 곧 닥쳐올 거야. 부지런히 거둬들여야지. 그래야 맘 편하게 아궁이 불 그득쳐 때고 들앉아 구들장 질 수 있지요. 이제 남은 건 콩이랑 팥이랑 메일하고 무 배추뿐이야. 논일이야 이 달 안으로 얼추 끝날 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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