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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15호] 귀농자탐방 - 귀농, 현실과 희망 사이에 놓는 다리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7 23:33 97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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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현실과 희망 사이에 놓는 다리 

김순정 (인드라망소식지기)



소식지 귀농자탐방을 위해 산내에 사시는 함지호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취재를 가도 돼냐는 질문에 “거 소식지에 나가면 항상 좋은 말만 쓰잖아요...”하며 말끝을 흐립니다. 그래도 떼쓰는 제 입장을 이해해 주셨는지 취재 오는걸 허락해 주십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귀농자탐방에 항상 좋은말만 썼나 싶습니다. 사실 평소에 잘 아는 사이가 아니면 하루 취재로 귀농해 살아온 세세한 고민들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모습으로, 말 사이사이에 전해오는 무언의 말로 땅 가까이 찾아들어간 시간들을 가늠해 보지만 글로 담기엔 제 실력이 역부족입니다. 그러다 보니 되도록 좋은 말을 찾아 쓰게 됩니다. 게다가 귀농하라고 교육하는 인드라망 소식지인데 귀농하면 죽도록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쓰긴 더 어렵지 않겠습니까. 넌지시 귀농해서 사는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 이야기 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레임을 더 많이 담는 것은 사실이지요. 아직 도시에서 살아가는 저의 환상이 그런 성향을 더욱 부채질 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귀농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람들이 귀농하려고 할때 다들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잖아요. 나도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했죠. 그런데 적게갖고 살아야지 해서 아주 많이 걱정하진 않았어요. 먹고 사는건 농사지어서 어떻게 해결 될 것 같더라구요.”


이런 결심으로 함지호씨는 2000년 괴산으로 귀농을 했다고 합니다. 때가 겨울이라 농사일이 없어 시골살이 좀 배워볼까 하고 실상사귀농학교에 입학하셨다고 하네요. 그게 인연이 되어 산내에 터를 잡고 살아가기 6년째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4살이던 두 아이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이가 되었고 식구도 한명 더 늘어 셋째가 태어났습니다. 시골살이 6년 동안 아이들이 자라고 식구가 늘어난 변화만 생긴 것은 아닙니다. 얼굴이 볕에 타고 팔에 근력이 붙고 낫질이 익숙해진 만큼 막연했던 시골살이가 점점 구체적인 생활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귀농했을때 논 10마지기 밭 천평 해서 한 3천평 정도는 혼자 농사지을 수있을 거 같더라구요. 농장이랑 교육원 있다가 나와서는 4-5년 정도 혼자 그정도 농사 지은거 같아요. 첫해에 농사 지어서 500-600만원 쯤 벌었나? 집짓는 일도 좀 다니고 해서 생활을 했지요.


작고 소박하게 생활하면 될 거 같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진 않더라구요.“


귀농해 3-4년째 농사규모와 살림살이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다고 합니다. 귀농자는 농사일에 익숙치 않아 귀농해 3-4년쯤은 별 소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기간을 버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호미질에 손가락이 안펴지도록 몸을 단련시켜 농사일에 적합한 농사꾼으로 환골탈퇴하는 경우가 있고 부부 중 한사람이 일정한 수입을 유지하는 직장을 계속 다니는 방법도 있습니다. 귀농자들 때아닌 주말부부로, 기러기아빠로 사는 경우는 대부분 농사일로 먹고 살수 있을 때까지 가족을 데려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당분간의 이별을 감내하는 경우지요.


그러다가 귀농 3-4년이 되면 정말 ‘먹고사는’ 현실적인 문제와 삶의 문제로 치열하게 부딪히는 시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생활에 적응이 돼면서 차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기도 하고 새로움이 주는 흥분이 가라 앉으며 현실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간이라는 말도 됩니다. 


“부부만 있다면 모를까 아이들이 있으면 3천평 정도 가지고는 소득이 어렵지요. 그래서 어느 정도 지나면 농사규모를 늘릴 고민을 하게되요. 한 7-8천평 정도 농사지으면 될까요. 그런데 갈등이 일어나죠. 그정도 농사지으면 농사짓는데 힘도 들고 농기계 안쓰고는 어렵거든요. 그럴려고 귀농을 선택한게 아니잖아요. 작고 소박한 삶과 농사규모 사이에서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사실 이 말을 듣고 당신은 그 갈등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농한지 10년이 넘은 귀농자도 소식지탐방을 가겠다고 하면 좀 더 안정되면 그때 찾아오라고 손사레를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고비 한고비 넘어갈때마다 갈등이 일고 한고개 넘으면 또 다가오는 다른 고개를 마주하며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딱히 귀농을 선택한 삶만이 그런것도 아니고 그건 도시살이도 마찬가지니까요. 더구나 홀홀단신 산속에서 산다면 모를까 세상과 살 부비며 살면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다 보면 얼마나 부딪히고 갈등할 것들이 많겠습니까. 그러니 귀농자들에게 그래, 귀농해보니 어떻냐고 살만하냐고 쉽게 묻는건 어리석은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함지호씨는 농사규모를 늘리려고 고민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산내는 귀농자들이 무척이나 많이 들어와 있는 지역인데다가 원래부터 농지에 비해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라 땅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산내가 귀농자가 많아서 심리적 부담감이 적은것은 좋지만 정작 농사지으려고 한다면 비싼 땅값 집갑에 그리 썩 좋은 지역이라고 할 순 없다는군요. 한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귀농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지만 경제적인 문제를 개별적으로 해결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씩 시도들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개별 귀농자들이 혼자 지고 가야 할 짐이 더 많고 그래서 더욱더 고민들이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함지호씨는 얼마전부터 섬진강지킴이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농사말고 다른 일거리를 찾은 셈이지요. 산내 지역이 땅값은 비싸지만 지역활동이 활발한 편이니 농사말고 다른 일거리를 찾기가 그나마 쉬운 편이라 다행입니다. 그렇게 서서히 생활의 터를 잡고 계신게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 윤희가 작은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작은학교학사추진위원장이란 자리도 맏으셨답니다. 부인 성용숙씨는 성용숙씨는 산내 천연염색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춘향골염색단’ 단장이십니다. 제가 찾아간 날도 함양 두레공동체에서 염색을 배우러 오신 분과 함께 삶고 찌고 짜는 염색일을 하느라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게 아쉬웠습니다. 농가부업으로 천연염색은 어떨까 해보지만 아직은 크게 도움이 될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합니다. 부업으로 돈을 만져볼라 치면 부업이 아니라 전업이 되어야 한다는게 귀농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던 말입니다. 부업도 규모와 물량에서 자유롭지 못한 면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함지호씨는 농사만으로 먹고살겠다는 생각을 다양하게 전환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농촌지역에 사람이 없다는 게 더 절박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랍니다. 농사를 안 짓더라도 사람들이 내려와 살면 북적대며 뭐라도 해보겠건만 한낮인데도 길가에 사람 없는 농촌마을을 보면 한숨이 푹푹 나오신답니다.


그러면서도 도시를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도시가 사람 살데가 못된다고 하잖아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경쟁이나 뭐나 더 심해져서 참 팍팍한데, 그렇다고 도시가 아주 없어져서도 안될 거 같아요. 그렇게 당장 없어져야 한다고 부정하기 보다 도시랑 농촌이 같이 살아야 한다고 봐요. 같이 가야 살수 있을거 같고... 저만 해도 그러니까.”


도시를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함은 시골살이 끝에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이젠 다시 도시에서 사는 삶을 꿈꾸지 않는다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어떻게 뿌리 내릴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 봅니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아직도 바람과 햇볓이 그렇게 좋을 수 가없다는 말속에서 자신이 선택한 삶의 자리에 도착한 사람을 봅니다. 현실이 그리 쉽지 않을지라도 부유하는 삶이 아닌 뿌리내리는 삶을 선택한 사람의 가슴뛰는 일상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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