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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인드라망인의 모습을 찾아(3)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1 04:49 67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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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탕물에 오염되지 않는 연꽃처럼(3)

-깨어있는 인드라망인의 모습을 찾아- 

도법스님



그때에 부처님이 기사굴산에 계셨다. 데바닷다는 출가한 다음 부지런히 수행 정진한 끝에 마침내 신족통을 얻었다. 어느 날 데바닷다는 아사세 태자에게 찾아가 신통력을 보였다. 허공에 솟아올라 앉아서 설법하고 바로 서서 설법했다.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기도 하고 몸을 숨겨서 설법하기도 했다. 데바닷다의 신통을 본 아사세 태자는 데바닷다에게 진심으로 감화되었다. 깊은 믿음과 존경심으로 데바닷다에게 공양을 올렸다. 아사세 태자와 대중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된 데바닷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속 깊이 숨어있던 영웅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승단의 최고 자리인 부처님 자리를 차지할 뜻으로 일을 꾸몄다. 데바닷다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여래께서는 항상 두타를 행하여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알며,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칭찬하셨다. 지금부터 나는 여래께서 칭찬하는 법보다 더 수승한 법을 설하여 대중들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 할 것이다. 첫째, 죽는 날 까지 오직 걸식만 한다. 둘째, 분소의(버려진 헝겊으로 만든 옷)만 입는다. 셋째, 맨땅에 앉아 생활한다. 넷째, 우유와 소금을 먹지 않는다. 다섯째,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다. 내가 부처님보다 더 엄격한 두타 수행법을 설하여 여러 비구들로 하여금 믿고 좋아하도록 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여러 동료 비구들이 데바닷다의 뜻에 동조했다. 데바닷다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대중들에게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데바닷다의 설명을 들은 비구들이 부처님을 찾아 뵙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부처님께서 물었다.

“데바닷다여! 그대는 진정 비구들에게 다섯 가지 법을 설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비구들에게 다섯 가지 법을 설했습니다.”

“데바닷다여! 사리사욕에 의한 다섯 가지 법은 불만과 갈등을 낳게 함으로 성스러움의 종자를 끊게 한다. 반면 성스러움의 종자를 끊게 하는 그대의 행위는 자신과 비구들에게 옳지 않고 유익하지 않다. 데바닷다여! 여래는 항상 의복을 얻었을 때 주어진 데로 만족할 줄 아는 자를 칭찬했다. 마찬가지로 음식, 평상, 침구, 약품을 얻었을 때 주어진 데로 만족할 줄 아는 자를 칭찬했다. 왜 그랬겠는가? 만족할 줄 아는 삶이 바로 성스러움의 종자를 가꾸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가 설한 만족함이 없는 다섯 가지 법은 성스러움을 끊는 법으로 옳지 않고 유익하지 않다.”


율장의 사분율 내용을 간추려 정리했다. 부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 데바닷다가 제시한 다섯 가지 법은 부처님이 제시한 비구가 의지해야 할  네 가지 법(①걸식 ②분소의 ③나무아래에 앉음 ④자연 치료법을 씀)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성스러움의 종자를 끊는 일이라며 나무라고 있다.

데바닷다가 제시한 원칙은 부처님이 제시한 원칙보다 더 순수하고 완벽하지만 만족함이 없는 법은 성스러움의 길이 될 수 없다며 크게 야단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승단에 이미 승가 대중이 함께 할 네 가지 법이 실천되고 있다. 그런데 사리사욕을 위한 다섯 가지 법이 설해질 경우 갈등과 혼란이 야기되어 화합 승가를 위험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사심에 의한 다섯 가지 법은 불만과 분열을 낳게 함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서로에게 유익하게 하는 성스러움의 종자를 길러낼 수가 없다.

성스러움의 종자라고 강조되고 있는 만족할 줄 아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아침에 밥을 먹게 되었다. 현재 주어진 밥 이외의 더 훌륭한 음식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온 세상이 만들어준 고맙고 감사한 최상의 음식이다. 점심에 죽을 먹게 되었다. 현재 주어진 죽 이외의 더 좋은 음식은 그 무엇도 있지 않다. 온 세상이 베풀어준 고맙고 감사한 최고의 음식이다.

한 끼의 음식에서처럼 여타의 주어진 조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그 어떤 삶도 성스러운 삶이 아니다. 오직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는 삶만이 진정 성스러운 삶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삶이 이토록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만족이 무엇인가? 편안함이다. 여유이다. 기쁨이다. 자유이다. 온전함이다. 굳이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무아의 삶이요, 본래 면목의 활발함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무심삼매의 삶이 온전하게 실현됨이다. 현실 생활이 수행으로 승화됨이다. 수행이 현실 생활에 심화됨이다. 생활이 곧 수행이요, 수행이 곧 생활이다. 생활과 수행의 불일불이(不一不二)함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연기무아의 세계관에 대한 인식과 확신을 확립해야 한다.

둘째, 존재의 실상인 무상무아에 대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셋째,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니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넷째,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는 현재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여섯째, 오직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는 현재를 온전하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보고, 생각하며 사는 삶을 인드라망인의 삶이라고 한다. 성스러움의 종자인 만족할 줄 아는 삶이 인드라망인의 삶이다. 흙탕물에 오염되지 않는 연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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