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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로 보는 부처님 생애4_혼인, 그리고 출가_유근자

인드라망사무처
2022-11-21 04:50 72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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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그리고 출가


현장 스님의 구법길을 따라


분주하던 마음은 내일부터 시작되는 여행으로 들떠 있다. 한 학기의 종강과 더불어 파키스탄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는 순례 일정을 잡았다. 불교의 전파 과정을 더듬으며 실크로드를 따라 번성했던 불교문화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길은 숱한 구법승들이 목숨을 걸고 걸었으며 불법(佛法)이 동아시아로 전해지는 루트이기도 하다.

당나라의 현장스님은 대소승 경론(經論) 67부 1,344권을 번역한 인물로 629년 중국을 출발하여 불교가 유행하고 있는 다섯 천축국(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여러 경전을 폭넓게 공부했던 분이다. 뛰어난 스님이 있는 곳은 방문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고 범본 경전을 많이 입수하여 645년 중국의 수도로 돌아왔다. 그후 18년 간 역경 사업에 몰두했으며 그 의 여행담은 『대당서역기』로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이번에 나는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와 399년에 중국을 출발한 법현 스님의 『법현전』, 신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국전』을 들고 그 길에 나선다.

나에겐 구법승들처럼 목숨을 담보로 한 비장함도 부족하고 불경을 구하겠다는 절심함도 덜하다. 한가지 뚜렷한 것은 수행자들의 종교적 열망과는 다른 현재 나의 최대 화두인 ‘박사논문’을 짊어지고 나선다는 점이다. 간다라 불전 부조를 통해 살펴본 인간 붓다의 일대기가 실크로드를 거치며 어떻게 신격화되어 가는가를 살피는 무거운 순례길이다. 뙤약볕 내리쬐는 한낮의 더위에도 씩씩하게 무거운 조사 장비가 든 가방을 메고 간다라의 평지에 있는 옛 절터와 산 속의 폐사지를 방문할 것이다. 남쪽에서 시작된 발걸음은 북쪽으로 이어져 높은 봉우리와 절벽이 나란히 뻗어있어 조금만 방심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객귀(客鬼)가 될 수도 있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지나 파미르 고원을 건널 것이다.

중국에 들어와서는 동서문명이 만나는 카슈가르에서 기차를 타고 쿠챠로, 다시 투르판으로 가 현장 스님이 인도로 가기 전에 고창국의 국씨왕에게 설법을 했던 고창고성에 들릴 것이다. 석양 무렵 고창고성에서 보는 앞산은 마치 불타는 산 같아 화염산인데 구법행에 나선 현장 스님이 되어 나도 그 산을 바라볼 것이다. 2002년 8월에는 현장스님이 인도로 갔던 길을 따라 갔다. 이번에는 거꾸로 많은 경험을 가슴에 담고 수많은 범본 경전을 구해 돌아오시는 길을 더듬는 과정이다. 2001년부터 시작된 간다라 미술의 숱한 조사와 연구가 이번 여정에서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 사뭇 설레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박사논문 마무리 전에 가져보는 마지막 여유로움이다.


간다라 미술 속의 석가모니 부처님 세계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야소다라와의 결혼, 첫 선정, 동서남북 네 문 밖 세상의 경험으로 정리된 출가의 결심, 화려한 궁정 생활, 위대한 출가에 한번 빠져~봅시다!

 


야쇼다라와 싯다르타 태자의 혼인


<그림 > 약혼, 31×31, 라호르박물관 소장무예 경기에서 실력을 과시했던 싯다르타 태자는 야소다라와 혼약을 한다. 태자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야소다라 뿐만 아니라 두 명의 비가 더 있다고 하는 설과, 3명은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혼인을 약속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는 간다라에 몇 점 전하는데, <그림 1>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맨 왼쪽에 있는 가장 크게 표현된 인물이 바로 싯달타 태자인데 아쉽게도 얼굴 부분이 파손되었다. 그 바로 옆에 머리칼을 올려 묶은 바라문은 왕실의 제식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우리의 관행에 따른다면 혼약을 증명하는 분일 것이다. 바라문 옆에 약간 쑥스러운 듯이 눈길을 아래로 두고 있는 여자가 바로 야소다라이다. 뒷열에 있는 인물들은 약혼을 축복하는 카필라 성의 토지 신들이다.

<그림 > 결혼 장면, 14×18cm, Sahri-Bahlol 출토, 페샤와르박물관 소장싯달타 태자는 야쇼다라를 얻기 위해 무예 시합에 참가했다. 당시의 관습은 신부를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무예를 겨뤄 승리한 자라야만 가능했다. 싯달타 태자의 사촌 동생 데바닷타 역시 그 시합에 참가했고 1등은 태자에게 내주었다. 이때부터 데바닷타는 늘 2인자로 열등감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른다.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해치려 했던 데바닷타가 결국은 땅이 갈라져 그 속에 묻혀 죽고 말았다는 유적이 당시까지도 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싯달타 태자는 마침내 야소다라와 결혼식을 올린다. 불전(佛典)에는 결혼 의식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결혼 의식은 신부 집에서 행해졌는데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 아버지에게 신부를 인도 받는 것이 당시 인도의 풍습이었다. 결혼 의식은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성수(聖水)를 뿌리고 베다의 화신(火神)인 불 주위를 빙빙돈다. <그림 2>에도 중앙 아래에는 성수가 든 물항아리와 불이 있고, 싯달타 태자와 야쇼다라는 손을 맞잡고 불 주변을 돌고 있다. 이때 두 사람 역시 여느 부부처럼 오순도순 아들 딸 낳고 부모 봉양하며 잘 살아보아 보겠다는 의지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평범한 중생의 모습 그대로 말이다. 신부 뒤에는 드레스 자락을 잡은 시녀가 뒤따르고 있고, 태자 뒤에는 신부 아버지가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축복하고 있다. 신부와 신랑 사이에 상반신만 보이고 있는 인물은 누굴까? 주례자일까, 아니면 신랑의 들러리 일까?


 첫 선정에 든 석가보살, Sahri-Bahlol 출토, 2-3세기,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 소장첫 선정에 든 석가보살


어둔 밤 산마루에 큰 불덩이 같고

가을의 밝은 달이 구름 사이에 솟은 듯

이제 태자가 앉아 생각에 잠김을 보니

털이 곤두서고 몸이 떨림을 알지 못하네(『불본행집경 ‘유희 관촉품’)


어느 날 정반왕은 석가족 모든 동자들과 함께 태자를 데리고 들에 나가 놀면서 밭갈이 하는 것을 구경했다. 그때 태자는 보습을 끄는 소가 피로할 대로 피로한데도 채찍에 얻어맞고  고삐로 목을 졸라서 피가 흘러 내리고 가죽과 살이 터지는 것을 보았다. 농부도 햇빛에 등이 타서 벌거숭이 몸에 먼지와 흙이 엉키었고 까마귀와 새가 날아와 다투어 벌레를 주어 먹는 것을 보았다. 태자는 이것을 보고 마치 사람들이 자기의 친족들이 얽매임을 당하는 것처럼 근심스레 바라보았다. 태자는 조용히 일행에서 빠져나와 염부 나무 아래로 가부좌를 틀었으며 시간이 흘러 해가 방향을 바꾸었지만 나무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고 태자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 이야기는 태자가 생노병사의 고통을 깨닫고 장차 출가를 결심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 불전 미술에서 중요한 주제로 등장했다. 주인공은 깨달음을 얻기 전이었으므로 보살로 나투었고 대좌에는<그림 > 화면 위로부터 탄생, 출가 하는 날 밤, 출가 장면, 46×28cm, 2-3세기, 파키스탄 카라치국립박물관 소장 밭갈이 장면을 묘사한 소와 채찍을 든 농부의 모습이 보인다.


봄에는 꽃이 피고 나이들면 죽는다, ‘위대한 출가’


어느 봄날, 학교에 올라가는 길에는 바람 따라 꽃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15년이 지나는 동안 박물관 앞 벚나무는 해마다 꽃을 피워 꽃비를 뿌렸건만 그날 유난히도 감동스러웠던 것은 내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었을거다. 20대 중반에 만난 그 벚나무는 봄의 일상사였겠지만 사십대에 접어들어 만난 그날의 벚꽃은 처절하리만큼 찬란했다. 나도 저 꽃처럼 찬란했던 순간이 있었을텐데…. 문득 앞으로 삶을 어떻게 물들일까로 고민하게 했던 봄날의 벚꽃이었다.

세상의 일체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구도 길에 나선 석가보살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준 분이다. 그 분의 출가를 미술로 나타낸 장면은 아주 간소하다. 세간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수행길에는 석가보살과 마부와 애마와 비사문천, 그리고 밤의 여신이 등장한다. 마부와 애마도 곳 되돌려 보내야 할 처지이다. 정반왕의 수비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 발굽은 야차가 몸으로 받았다. 화면의 왼쪽에 갑옷을 입고 화살을 든 이는 석가보살의 수행길을 인도하는 비사문천이다. 말은 금방이라도 화면 속에서 튀어나와 하늘을 날아 성을 뛰어넘을 것 같다.

정면성이 강한 석가보살의 모습은 태양신 표현에서 유래했다. 비사문천이 든 화살은 어두운 밤을 밝히는 조명기구 기능을 하고,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바람으로 부풀린 숄 모양의 천을 두르고 있는 여신상은 그리스·로마의 ‘밤의 여신’과 일치한다. 이러한 것들은 밤 사이에 일어난 출가유성(出家踰城)을 암시한다. 위에서부터 탄생, 출가하기 바로 전의 풍경, 그리고 성을 떠나는 장면이 하나로 묶여 구도길의 석가보살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했다.

<그림 > 고행상, 3-4세기, Sikri 출토, 84×53cm, 라호르박물관 소장석가모니불의 활동 지역인 중인도에서는 육신의 출생 보다는 ‘영적 탄생’인 출가를 훨씬 중요시 여겼다. 그들은 부처님의 일대기를 표현할 때도 초기에는 과감히 인간의 모습은 생략하고 보리수며, 금강보좌며, 산개며, 불족(佛足)으로 나타낼 뿐이었다. 그 후로도 ‘붓다 불표현’의 전통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1세기를 지나면서 서북인도에 속했던 현재의 파키스탄인 간다라 지역에서는 인간 붓다의 모습을 표현했다. 중인도 지역이 초인적 관점에서 석가모니불을 인식했다면 간다라 지역에서는 인간 붓다로 받아들였음을 짐작케 한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나이들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 속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오늘도 방황하고 있다. 석가보살의 ‘위대한 출가’를 보면서 내 삶을 한번 돌아볼 일이다.


나는 부처가 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스승은 내게 이르시길 “네가 바로 서야 한다. 이 세상은 옷 잘 입고 맛있는 것 먹으려고 온 게 아니다. 네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잊지 말고 정진에 힘쓰거라” 하신다. “네. 잘 알겠습니다” 하고는 예쁜 옷이 걸린 옷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석가보살이 카필라성을 나와 수행자들 무리 속에 들어간 지 어느 덧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최후의 수단으로 모진 고행을 선택했다. 보살의 아름답게 빛나던 젊은 육체는 볼품없이 여위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한 천신이 천상의 마야부인에게 이 소식을 알리자 마야 부인은 부랴부랴 보살에게로 향했다. 보살은 어머니를 안심시키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처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고행자의 몸은 비록 말랐지만 그 눈빛 만은 형형하기 그지없다. 혹시 파키스탄의 라호르에 가거든 박물관에 들러 이 부처님을 친견해 보시길 권한다. 그분의 형형한 눈빛과 용솟음치는 심장 소리는 어둠 속을 헤매는 그대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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